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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의 모순

by 이정호

1. 한국 사회에서의 직함 문화


한국 사회에서 '직함'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개인의 정체성, 사회적 지위, 그리고 심지어는 권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회사의 직원은 물론이고 학교, 공공기관 등 거의 모든 조직에서 직함은 위계질서를 명확히 하고 소통 방식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김 부장님", "이 과장님"처럼 직함을 붙여 상대를 호칭하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로 여겨지며, 때로는 직함 자체가 개인의 가치를 대변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직함 중심 문화는 효율적인 업무 분담과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 이면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모순과 문제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2. 직함이 가지는 의미와 영향


직함은 조직 내에서 개인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한다. 이는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의사결정 과정을 간소화하는 데 기여한다. 또한, 직함은 소속감을 부여하고 개인의 성취감을 높이는 동기 부여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승진을 통해 더 높은 직함을 얻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목표가 되며, 이는 곧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영향은 종종 직함이 가진 또 다른 측면, 즉 위계와 권위의 상징으로서의 기능에 의해 가려지기도 한다.


3. 직함의 그림자


직함은 때로 불필요한 위계의식과 경직된 소통을 낳는다. 직함의 높낮이에 따라 발언의 무게가 달라지고, 하위 직급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소극적으로 개진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비판적인 시각이 위축되고, 결국 조직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직함은 개인의 역량이나 인격보다는 소속된 조직 내에서의 위치를 우선시하는 풍조를 만들기도 한다.


4. 직함이 퇴직 후에도 이어지는 현상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직함 중심 문화가 퇴직 후에도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김 사장님", "이 회장님"처럼 과거의 직함을 그대로 사용하며 상대를 호칭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비단 과거의 직위가 높았던 이들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의 부장이나 이사 등 특정 직함을 가졌던 이들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퇴직 후에는 공식적인 직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직함으로 불리기를 선호하거나, 사회생활에서 이를 통해 인정을 받으려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5. 사회적 모순과 문제점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가 개인의 가치를 평가할 때 여전히 '직함'이라는 외형적 요소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개인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기보다는, 그가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모순을 야기한다. 또한, 직함이 없거나 낮은 사람들을 은연중에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건강한 사회관계를 저해하고, 퇴직자들이 사회에 다시 통합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6. 다른 나라의 존칭 문화와 비교 분석


한국 사회의 이러한 직함 중심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존칭 문화를 비교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 미국, 유럽, 일본과의 비교


미국과 유럽의 경우, 공식적인 자리 나 비즈니스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방을 'Mr.', 'Ms.'와 같은 일반적인 존칭 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직함은 주로 비즈니스 카드나 이메일 등 정보 전달의 목적으로 사용되며,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개인의 역할을 존중하되, 호칭을 통해 불필요한 위계를 만들지 않으려는 문화적 배경을 반영한다.


일본 역시 한국처럼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조직 내에서 직함은 중요하게 사용되지만, 한국과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일본에서는 '상(さん)', '님(さま)'과 같은 존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직함을 붙여 부르는 경우도 흔하지만, 한국처럼 직함 자체가 직접적인 권위를 드러내기보다는 조직 내에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가 강하다.


특히, '선생님(先生, 센세이)'이라는 호칭은 한국처럼 넓게 사용되기보다는 특정 직업군에 한정하여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학교 선생님은 물론 의사, 변호사, 작가, 예술가 등 전문성을 가진 직업의 종사자나 스승에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사용된다. 이는 해당 분야의 지식이나 기술을 인정하고 존경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일반적인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7. 새로운 존중 문화 제안


다른 문화권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직함 없이도 충분히 상대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성을 느낀다.


- 이름을 통한 존중의 가치


궁극적으로는 이름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제안하고자 한다.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 뒤에 존칭을 붙여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철수 님", "박영희 선생님"처럼 말이다. 이는 상대방의 고유한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의미를 내포한다. 직함이 주는 외형적인 권위나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 대 개인으로서 서로를 마주하는 건강한 소통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조직 내에서는 업무 효율성을 위해 최소한의 직함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소통에서 굳이 직함을 고집하기보다는, 이름을 통한 존중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는 특히 퇴직 후에도 이어지는 '과거 직함'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사회적 역할이 없음에도 과거의 직함에 얽매이거나, 이를 통해 타인을 평가하는 불필요한 관행을 줄일 수 있다.


8. 앞으로의 변화 방향 제시


이러한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 어렵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인식이 변화하고 노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언론과 교육을 통해 이름을 통한 존중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알리고, 기업과 조직 내에서도 수평적인 소통 문화를 장려하며 직함 사용에 대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직함이 개인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역할의 한 부분일 뿐임을 인지하는 성숙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름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존중하는 문화는 불필요한 위계의식을 타파하고, 모든 개인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더욱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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