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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백을 거닐다

가을에서 여름까지의 마음 산책

by 이정호

가을이 오면 마음 한편이 저절로 느려진다.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며 자신을 비워내듯, 우리도 조금은 내려놓고 멈추어 선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생각이 깊어지고, 하늘은 한없이 높아진다.


그 하늘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기다림이란, 어쩌면 가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섬세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떠나간 여름을 그리워하면서도, 다가올 겨울을 조용히 기다리는 그 중간의 온도. 그 애틋한 온기 속에서 우리는 다시 자신을 마주한다.


붉게 물든 단풍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질 때마다 마음도 조금씩 비워진다. 그 공허함이 처음엔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이내 깨닫는다. 그것은 새로운 감정을 담기 위한 빈자리였음을. 모든 아름다움에는 언젠가의 이별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가을은 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 와 있나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면, 내 안의 목소리가 조용히 대답한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가을 하늘은 유난히 맑고 높다. 그 푸른빛 사이로 흘러가는 구름 속에는 어쩐지 그리운 얼굴 하나쯤은 숨어 있는 것 같다. 먼 곳에 있는 누군가의 웃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목소리, 그런 것들이 바람결에 실려 마음에 닿는다. 바람은 때로 쓸쓸하지만, 그리움이 있다는 건 여전히 마음이 따뜻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겨울이 온다. 세상은 조용히 식어가고, 공기는 차갑게 굳어간다. 그러나 그 차가움 속에서 오히려 따뜻함의 의미를 배운다. 겨울은 고요의 계절이지만,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한 잔의 차, 한 줄기 햇살, 누군가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다. 진짜 따뜻함은 외부의 온도가 아니라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빛이라는 걸, 우리는 이 계절에 비로소 깨닫는다.


긴 겨울밤은 때로 외롭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별은 여전히 빛난다.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여도 희망은 조용히 자라고 있다. 눈이 내린 새벽, 창가에 앉아 하얀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잠시 멈춘 듯한 그 고요함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차가운 계절은 우리에게 묻는다. “진짜 따뜻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안다. 그건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마음, 그 작은 온기 하나라고.


이윽고 봄이 온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분명히. 얼었던 땅이 조금씩 녹고, 작은 싹이 얼굴을 내민다. 바람은 부드러워지고, 햇살은 살결을 어루만진다. 봄은 늘 그렇게 다가온다.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라고 말하듯. 긴 겨울 동안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천천히 기지개를 켠다.


꽃이 피면 마음도 피어난다. 봄의 향기 속에서 우리는 다시 웃고, 사랑하고, 설레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변하고 흘러가지만, 봄만큼은 늘 새로운 시작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문득 창문을 열고 바람을 들이면, 그 속에서 들려오는 봄의 속삭임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라.” 그 부드러운 한마디에, 굳어 있던 시간도 녹아내린다.


그리고 여름. 계절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의 계절. 뜨거운 태양 아래 세상은 생기로 가득 차고, 모든 것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반짝인다. 매미의 울음이 공기를 채우고, 노을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여름의 열기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삶의 에너지를 느낀다. 그러나 그 뜨거움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오는 여름밤의 고요함은 더욱 특별하다.


달빛이 흩어지는 여름밤, 바람이 살짝 스치는 그 순간, 세상이 잠시 멈춘 듯 고요하다. 낮의 활기가 잦아든 그 시간, 우리는 오히려 더 깊이 숨을 고르고, 자신을 돌아본다. 여름의 뜨거움이 우리를 성장시켰다면, 여름밤의 고요는 그 성장을 다독여준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가을의 기다림, 겨울의 고요, 봄의 속삭임, 여름의 생명력.


그 모든 계절이 지나오며 남긴 것은 결국 하나의 마음이었다. 삶은 언제나 순환하며,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계절은 돌고, 우리는 그 안에서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속의 따뜻함이다.


낙엽이 흩날리는 길 위에서도, 눈 내린 아침의 차가운 창가에서도, 꽃이 피는 봄날의 골목에서도, 별빛 내리는 여름밤에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삶을 이어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천천히 걷는다.

계절의 여백을 따라, 마음의 온도를 따라,

삶이 흘러가는 그 길 위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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