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내는 선택

비워야 채워지는 것들에 대하여

by 이정호

제주도 귤밭의 이른 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조용한 노동이 시작됩니다. 바람이 아직 차갑고, 꽃망울이 막 터지려는 그 찰나에, 농부는 꽃을 딴다. 이제 막 세상에 얼굴을 내민 꽃을 손수 따내는 일. 그것은 얼핏 보면 잔인한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사랑의 몸짓입니다.


꽃이 많다는 것은 가능성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이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품을 수 있는 영양분은 한정되어 있고, 그 한정된 자원을 수백 개의 열매에 고루 나누면, 결국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익지 못합니다.


반짝이는 빛깔도, 진한 향기도, 묵직한 단맛도, 모든 것이 조금씩 모자란 채로 끝나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농부는 버립니다. 아직 초록빛을 머금고 있는 어린 열매를, 조금만 더 두면 그럴듯하게 자랄 것 같은 그것을, 과감하게 손으로 떼어냅니다. 손끝에 전해지는 작은 저항감. 그 감촉 속에는 아쉬움이 있고, 미안함이 있고, 그러나 동시에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무를 위한 길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


우리는 왜 버리지 못하는가


사람의 마음은 귤나무와 닮았습니다. 우리는 늘 너무 많은 것을 품으려 합니다. 너무 많은 꿈, 너무 많은 관계, 너무 많은 약속, 너무 많은 역할.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이루고 싶다는 욕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욕심이 아니라 두려움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를 내려놓으면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


그러나 버리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붙들고 있으면, 우리의 에너지는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남들이 기대하는 일 사이에서 우리는 점점 얇아집니다. 마치 수백 개의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처럼.


겉보기에는 풍성해 보이지만, 정작 어느 하나도 충분히 달지 못한 채.


스페인의 철학자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말했습니다. "얻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은 버릴 줄 아는 것이다." 얼마나 정확한 통찰인지요. 무언가를 얻으려면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미 손에 쥔 것을,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을, 내 일부가 되어버린 것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것.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용기를 요구합니다.


비움이 만드는 충만함


저는 한동안 여러 가지를 동시에 붙들고 살았습니다. 미완성된 글, 완성하지 못한 약속, 내 것이라 믿었지만 이미 식어버린 관계들. 그것들을 놓아주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 같아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결실을 맺을 것 같아서.


그러나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놓아주지 못한 것들이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그것들에게 쏟는 에너지가, 정작 소중한 것들에게 가야 할 영양분을 빼앗고 있다는 것을. 귤나무가 꽃을 솎아내듯, 나도 내 삶에서 무언가를 덜어내야 할 때였습니다.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선택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비우는 행위, 더 깊어지기 위해 더 넓어지기를 멈추는 결단. 텅 빈자리는 상실이 아니라 가능성의 공간이 됩니다. 비워진 그 자리에 비로소 진짜 원하는 것이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농부가 열매를 솎아낸 자리에서 남은 귤들은 더 풍성하게 자랍니다. 영양이 집중되고, 빛이 고루 닿고, 바람이 잘 통합니다. 그렇게 자란 귤은 껍질부터 다릅니다. 윤기가 흐르고, 속이 꽉 차 있으며, 한 입 베어 물면 그 진한 단맛이 혀 위에서 오래도록 머뭅니다. 비움이 만들어낸 충만함입니다.


더 단단한 삶을 향하여


삶에서 무언가를 덜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접는 일, 더 이상 나에게 맞지 않는 역할에서 물러나는 일, 오래된 습관을 버리는 일. 그것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아픔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성장통입니다. 더 본질적인 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좁은 문.


제주의 농부는 오늘도 이른 아침, 귤밭에 섭니다. 이슬이 맺힌 잎사귀 사이로 손을 뻗어, 지금 당장은 아쉽더라도, 나중에 더 좋은 열매를 위해 과감히 떼어냅니다. 그 손길에는 망설임보다 확신이, 아쉬움보다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지금 손에 쥔 모든 것이 반드시 좋은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내려놓는 것이 더 단단한 삶을 만든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집중할 때, 그 하나가 얼마나 깊고 풍성하게 자랄 수 있는지를.


오늘, 당신 삶에서 덜어내야 할 꽃은 무엇인가요? 아깝다는 마음이 드는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지금 내려놓아야 할 바로 그것일지 모릅니다.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가장 잘 익은 귤 하나가 얼마나 달고 향기로운지를.


"얻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은 버릴 줄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