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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마음, 에스프레소가 되어

by 이정호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자주 접하고, 아마도 가장 친숙하게 즐기는 음료를 꼽으라면 단연 커피일 것이다. 아메리카노, 라떼, 카푸치노, 마키아토, 플랫화이트, 모카, 프라푸치노, 콜드브루 등 세어보자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름들이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이 무수한 커피의 원점이 단 하나의 에스프레소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새삼 경이롭다. 뜨거운 물을 살짝 더해 아메리카노가 되고, 부드러운 우유를 가득 채워 라떼가 된다. 우유 거품을 풍성히 얹으면 카푸치노, 거품을 아주 조금만 얹어 깔끔한 맛을 내면 마키아토가 되고, 우유와 거품의 섬세한 조화가 플랫화이트를 만들어낸다. 초콜릿 시럽과 우유가 만나면 모카가 되고, 얼음을 갈아 첨가하면 시원한 프라푸치노가 되며, 차가운 물로 오랜 시간 천천히 추출하면 콜드브루가 탄생한다.


이렇듯 하나의 에스프레소는 수많은 취향과 기호를 넘어 다양한 문화 속으로 변주되어 간다. 한 잔의 커피를 주문할 때마다 마시는 이가 선호하는 맛과 향, 그리고 감성이 담겨 있음을 생각하면, 커피 한 잔에도 작은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국적, 언어, 재력, 직업, 취미, 성격, 가치관 등 우리를 설명해 주는 요소들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82억 인구 중에는 나와 완벽히 같은 유전자나 지문, 동공, 정맥을 지닌 사람이 없다. 가장 가까운 일란성쌍둥이조차 세월이 흐르면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며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 이러한 차이들 덕분에 사회는 다채로운 문화와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치 아메리카노와 라떼, 카푸치노와 마키아토가 모두 색도 맛도 다르면서, 그 개성들이 결국 커피라는 이름 아래 어울려 있듯이 말이다.


호모사피엔스라는 같고도 단순한 범주로 시작된 인류가 이렇게나 다채롭게 뻗어나가며 사회를 이룬다는 사실은 신비롭다 못해 아름답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역시, 지역마다 다른 기후와 토양을 거쳐 재배된 원두가 로스팅 온도와 시간에 따라 맛과 향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끓는 물의 압력과 추출 시간에 따라 또 한 번의 운명을 맞이한다. 사람이 태어나 자라는 환경, 교육, 문화, 만나는 사람들, 지나온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닮아 있다.


나 또한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모든 변화와 변주를 가능케 해주는 '단 하나의 근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에스프레소가 온갖 커피의 베이스가 되어주듯, 나라는 존재 역시 어떤 상황에 놓이든 흔들리지 않는 본질이 있고 싶다. 여러 가지 역할을 맡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도전에 부딪히더라도, 내 안의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고 농도 짙은 ‘본래의 나’를 지켜내는 것이다.


그런 단단한 중심이 있다면, 앞으로 어떤 삶의 조합을 거치더라도 나답게 빛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안과 편안함을 줄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얼어붙은 마음을 깨우는 차가운 자극이 될 수도 있다. 모카처럼 달콤한 추억을 만들어줄 수도 있고, 에스프레소 고유의 짙은 풍미로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 상황과 취향에 따라 다른 맛을 내지만, 결국 근원은 하나다.


단 한 잔의 커피를 위해 농부가 땀 흘려 원두를 재배하고, 로스터가 정성을 다해 볶아내며, 바리스타가 솜씨를 발휘해 추출하는 긴 여정이 있듯,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겪는 모든 일, 느끼는 모든 감정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커피가 한 장인의 손길에 따라 독특한 개성과 향을 피워내듯, 우리도 각자의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담금질하고 발현할지에 따라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고유의 향을 내뿜게 된다.


그래서 오늘도 작은 소망을 품는다. 나는 여러 가지 역할을 맡으면서도 언제나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모임이든, 조직이든, 공동체든 내가 에스프레소처럼 굳건히 자리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타인에게 한 모금의 휴식과 위로, 혹은 새로운 활력을 선사하기를 바란다. 세상에 나만의 향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그리고 그 향이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소망으로 말이다.


결국 우리의 인생도 에스프레소에서 시작되는 무궁무진한 커피의 변주처럼, 무한히 확장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즐기는 데서 오는 기쁨,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에서 나오는 진한 향이 우리를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다. 갈수록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나 역시 한 잔의 에스프레소가 되어, 누군가에게 절실히 필요한 순간에 깊은 농도와 향기를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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