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부처와 조성진의 쇼팽

복제를 넘어 현존으로

by 여자 말러리안

오늘날 이어폰을 통해 흐르는 조성진의 쇼팽 연주는 과연 실재하는 음악인가. 단지 디지털 기록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완성되는 새로운 음악적 사건인가. 우리는 그것을 ‘녹음’이라 부르지만, 그 말만으로는 이 경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이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있다.

백남준 <Tv부처>

바로 백남준 의 <TV 부처>다.

작품 속 부처는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는 부처를 비추고, TV는 그 영상을 송출하며, 부처는 다시 그 화면을 응시한다. 이 ‘폐쇄 회로’는 단순한 장치의 순환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실재이며 무엇이 이미지인지, 그리고 기술은 단순히 실재를 흉내 내는 재현 도구에 불과한지를 끈질기게 되묻는 구조다. 우리는 흔히 눈앞의 청동 부처를 ‘실재’라 믿고, TV 속 영상을 가짜 혹은 ‘기술적 재현’이라 치부한다. 하지만 백남준의 회로 안에서 이 경계는 허물어질 수 있다. 부처가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을 통해 깊은 성찰에 잠길 수 있다면, 그 순간 TV 속 이미지는 가짜가 아닌, 깨달음을 매개하는 또 하나의 실재로 읽힐 수 있다.


이처럼 매체를 통해 드러난 이미지를 하나의 ‘현존’으로 볼 수 있다면, 음악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가능해진다. 만약 녹음을 단순히 현장을 흉내 낸 ‘그림자’로만 본다면, 우리는 매 순간 음악의 복제품을 소비하는 셈이 된다.

물론 녹음은 현장을 그대로 담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연주자의 해석, 음색, 시간의 감각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보존되고, 다시 되새겨지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음향은 원본의 열등한 복제가 아니라, 또 하나의 미학적 현존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디지털 음향을 또 하나의 ‘현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는 스피노자가 말한 ‘양태’의 개념과도 닮아 있다 그는 하나의 실체가 다양한 방식(양태, Mode)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연주자의 실연이 '공간의 생생한울림'이라는 양태로 존재한다면, 녹음된 데이터는 '디지털 신호'라는 또 다른 양태로 그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형식이 달라졌을 뿐, 그 안에 깃든 예술적 본질이 훼손된 것은 아니다. 신과 자연을 하나로 보았던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기술 역시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본질이 자신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자연스러운 방식이 될 수 있다.


0과 1의 데이터로 환원된 소리는 언뜻 차갑고 비물질적으로 느껴질지라도, 가느다란 이어폰을 통해 다시 생명력을 얻어 우리의 청각 속으로 스며든다. 죽어 있는 정보처럼 느껴졌던 데이터가 다시 울림을 얻고,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청취 안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순간이다. 이때 매체는 예술을 훼손하는 장벽이 아니라, 매개하는 통로가 된다. 결국 〈TV 부처〉는 기술이 우리를 예술 혹은 본질과는 양극단에 존재한다는 익숙한 관념을 흔든다. 부처가 TV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침묵 속에 머물 듯, 우리 또한 디지털 매체를 통해 예술과 다른 방식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은 예술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지닌 또 하나의 ‘필연적 현존’이 된다.


그렇다면, 예술은 더 이상 특정 시간과 장소에 갇혀 있지 않다. 출근길 이어폰을 끼고 조성진의 쇼팽을 재생하는 순간, 혹은 화면 속 백남준의 부처를 마주하는 찰나, 우리의 일상은 그 자체로 거대한 전시장이나 콘서트홀이 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