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의 채무 관계를 종료하며
좋아하는 마음, 잘하고 싶은 마음이 날 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때가 있다. 설레던 시작이 구체적인 ‘목표’가 되는 순간, 다정한 이정표는 나를 채찍질하는 가혹한 감시관으로 변한다. 그렇게 목표는 어느새 나를 집어삼키고 만다.
내가 입시를 치르던 시절, 나를 움직이던 동력은 주로 ‘자기혐오’였다. 부족한 음색, 남보다 못한 실력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성장을 위한 과정이 아닌, 하루빨리 도려내야 할 결함처럼 여겼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나 자신과 일종의 ‘계약’을 맺고 있었다.
‘이만큼의 시간을 투자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완벽한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가혹한 계산이었다. 그렇게 성과가 나오지 않는 날이면 나는 스스로 계약 위반자가 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음악은 즐거움이 아니라 증명의 대상이 되었고, 사랑했던 음악은 냉혹한 채권자가 되어 나를 독촉했다.
하지만 인생의 목표는 형태만 바뀔 뿐, 늘 생기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오래된 습관처럼 그 감시관이 고개를 들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으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해야지.”
과거의 감시관이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과 조금 다르다. 이제 나는 내 안의 감시관을 향해 당당하게 외친다.
“나에겐 모자랄 권리가 있어!”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존재에게 ‘부족함’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상태다. 씨앗에게 왜 당장 꽃을 피우지 못하느냐고 다그치지 않듯, 우린 느릿느릿 새로운 세계를 향해 정직하게 걸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요즘 매주 지휘 영상을 찍어 선생님께 피드백을 받는데, 이 시간은 내게 일종의 고문과도 같다. 화면 속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이 마치 속절없이 펄럭거리는 마트 앞 풍선 인형 같기 때문이다. 그 서툰 모습을 선생님과 함께 마주해야 하는 순간은 매번 곤혹스럽고, 때로는 비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문득 묘한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내가 이걸 잘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옭아매던 부당한 계약서를 찢어버리는 일, 그렇게 자신을 채무불이행자로 몰아세우는 대신 각자의 ‘못할 권리’를 기꺼이 허락하는 일이 아닐까. 그러니 나는 오늘도 기꺼이 풍선 인형처럼 펄럭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