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푹 잤다는 개운함과 이렇게 또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죽음과 가까워졌다는 묘한 불쾌감이 뒤섞인다. 나는 이미 느지막이 어두워진 창문 밖을 바라보며, 침대에서 나오지도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내 방에 먼지 한 톨, 빵 부스러기 한 조각 바닥에 떨어진 걸 보고도 못 지나치지만 이상하게 담배만큼은 머리맡에 둔다. 언젠가 밤을 같이 보낸 그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특이한 습관이라며 비소를 던진 적이 있다. 나도 딱히 정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러기에 난 너무 많은 부분에서 정상적이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 오랜 시간 잤다는 건 잠이 필요해서 그랬나보다 라고 자위하며 폰을 켜보니 부재중 전화 두 통과 메시지가 와있다.
[집이야? 왜 연락이 안돼?]
[자?]
[내가 너 집으로 갈까?]
갑자기 머리에 찌르듯 한 고통이 찾아온다.
"하 씨…."
생각해 보면 딱히 욕할만한 상황도 아니다. 그냥 연락을 늦게 봤을 때 으레 그렇게 행동했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모양이다. 그런데 뭔가 찝찝한 것이다. 마치 고군분투하며 빨래를 개고 나니 언제인지도 모르게 정체불명의 끈적거리는 물질이 손에 가득 뭍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처럼.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누구를 탓해야하는지 모르는 이 상황에 미지근한 혐오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뭔가 잘못을 한 것 같이 돼버린 듯한 상황이 유쾌하진 않으니까.
[미안. 못 봤네]
내가 생각해도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는 무책임한 짧은 답장 하나를 배설하듯 보내고 폰을 다시 닫아버렸다. 담배 연기를 사람 얼굴에 뱉는 행위를 문자로 형상화한다면 이런 류의 답장이겠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힘을 싣는다.
담배를 다 피고 나니 커피를 향한 갈증이 솓구친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청소기로 바닥에 담뱃재를 빨아들이고 내친김에 집 구석구석 청소한다. 처음에는 목이 커피를 원했다가, 차츰 온 몸으로 번져 청소를 끝낼 즘에는 손 끝 발 끝 조차 커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오후 8시 26분이다. 늦긴 했지만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시간이지 않나? 나 스스로에게 인지, 카페 사장에게 인지, 이 비루한 삶을 어디선가 은밀히 엿보고 있을 어떤 무한한 존재에게 인지 모를 변명에 가까운 수사적이기 짝이 없는 질문을 허공에 던진다. 물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리라. 멍을 때리더라도 좀 늦게까지 하는 카페에 가서 여유를 가지고 오늘 남은 시간을 죽이는게 현명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새 연락이 더 와있지만 못 본 척하고 다른 폰을 집어 들고 모자와 겉옷만 챙겨 도망치듯 집 밖으로 나왔다. 아무에게도 그 어떤한 연락도 오지 않는 휴대폰이다. 깔린 앱이라고는 지도, 음악 스트리밍 앱과 유튜브 정도이다. 일부러 SNS도 깔지 않았다. 이 두 번째 폰에 내가 살고 싶은 삶을 투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순간 난 이 폰 자체를 동경하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어떤 간섭도 없는 넌 좋겠다.'
아직은 제법 쌀쌀한 3월의 저녁 공기를 마시며 큰 길가로 나오니 자동차들이 불빛이 시끄럽게 내고 있다. 한쪽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으로 지도 앱을 켜서 카페를 몇분 가량 찾아보니 도보 15분 거리에 24시 카페가 있다고 한다. 집 앞에 맛이 보장된 단골 카페를 갈까 여길 가볼까 잠깐 고민하고, 좀 걸어가 보기로 결정한다.
'너무 안 움직이긴 했어 오늘'
그러며 아까 잠깐 생각한 우리 집에 있는 무한한 존재가 다시 떠오른다. 딱히 생산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내 삶을 엿보고 있을 수도 있는 이 존재에 대한 생각은 철학적 고찰이라기엔 거창하며 절망에 가깝운 의식의 흐름이었다. 이 삶을 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것은 실망감이나 연민 따위의 감정일까, 혹은 그저 코메디 같을 수도 있겠다. 어떻게 되었든 결론은 변태가 틀림없다는 것이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도착한 카페는 한 블럭의 중간 즈음 위치한 골목길 구옥 건물 2층에 있었다. 1.5층에 있는 화장실을 지나 2층으로 오르니 카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잘 되지 않은 풍경이다. 투박하게 닫힌 잿빛 현관문이 불친절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있다. 딱히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아 좁은 2층에서 잠시 두리번거린다. 여느 중소기업 사무실의 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 우블리에트를* 다시 보니 아주 작은 마스킹 테이프로 카페 이름이 작게 써있다.
작은 안도와 별안간 찾아온 두려움이 문을 열기를 망설이게 한다. 오늘 처음 맞이하는 나와 다른 인간과의 조우에 대한 두려움이자,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모습의 공간이라 실망하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이리라. 나는 또 아주 잠깐 문고리를 잡고 망설인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는 선택지에 대한 자신이 없다.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리왔다. 나는 어느새 20대의 끝자락에 있고, 내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져주지 못한다. 항상 문을 여는 것에 대한 후회 없이 살아오고 있다고 굳게 믿었는데, 내가 연 문들이 매력적이었는지에 대한 확신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문을 여니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찜질방에 온 것 마냥 찌는 열기가 나를 반긴다. 카페 한 쪽 벽 전체를 차지한 창문에는 이슬이 맺히다 못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 카페 안의 모든 눈이 나를 향했다.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카페였는지 온통 잘 차려입고 행복한 주말 저녁을 보내는 쌍들로 가득하다. 이 공작새들의 시선은 독을 바른 화살마냥 홀로 이 던전을 홀로 찾은 용감무쌍한 용사의 온 몸을 관통해 장기 하나하나를 망가뜨린다. 몸 곳곳의 모세혈관들이 터져 열등감이 새어나오는게 느껴졌다. 이 영겁의 시간이 결국 끝나지 않는다면 사람은 수치심으로도 실질적 죽음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들어왔다'
시선들이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데는 아마 0.5초도 채 걸리지 않았으리라. 정신을 차리며 다 터져버린 장기와 모세혈관들을 서둘러 봉합시키며 눈을 돌려 카운터를 찾았다. 뭐라고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한참 입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분명 따뜻한 플랫 화이트를 먹고 싶다는 생각으로 찾은 카페였지만 이 무시무시한 굴의 열기에 굴복한다.
돌아보니 더 이상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그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미 내 온몸은 상처를 입었기에, 빠르게 눈을 돌려 자리를 찾아서 쉬어야한다. 다행히 구석진 자리를 발견하고 앉아 회색 페인트가 오돌토돌 나와있는 시멘트 벽에 기대어 몸을 식혀보려는 노력을 한다. 이미 모자 밖으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져 겉옷과 모자를 벗고 나니 집에서 입고 나온 늘어난 반팔티 한 장이 땀에 얼룩져있다. 이 시점에 나는 화살을 더 받아도 개의치 않은 수준에 다 달았다.
더위가 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기 시작할 때 쯤 아까 주문할 때 응대했던 반절 정도 죽은 눈을 한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흰색 니트에 커피 얼룩이 군데군데 뭍어있는 직원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NPC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진동벨 따위도 없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 기다란 유리잔에 나온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크레마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는 고소하면서도 탄맛은 나지 않은 훌륭한 수준의 커피였기에 평소였다면 시간을 두고 음미했을 듯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숨 쉬는 것도 까먹은 채 쉬지 않고 검은 생명수를 몸에 쏟아넣고 나니 거짓말처럼 회복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서야 어두컴컴한 카페의 요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윗입술에 뭍은 크레마를 혀로 닦으며 이리저리 둘러보니
익숙한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은색 배경에 붉은 글씨로 쓰인 이탈리아어.
'라 마르조꼬'
*우블리에트 : 성관 등의 지하 깊숙한 곳에 건설된 구조물로 주로 중세시대 감옥이나 던전의 입구를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