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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민주주의

악의 평범성

by Sports Scientist

#민주주의의 취약성


'법치'가 울고 있다. '염치'의 오리발에 상처가 깊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외롭다.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다. 법이 지배한다는 뜻이다. 정확하게는 권력자의 자의적 통치가 법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된다는 의미다. 독재자들은 시민의 입을 막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12.3 내란은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강타했다. 불확실성은 어느 때보다 큰 파도로 다가오고 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에 나온 문장이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은 시민군들의 심경에 관한 글로,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12.3 내란의 밤 계엄군의 차량을 맨몸으로 막고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의 마음이 포개진다.




#잘못된 정치적 결정이 위험한 이유


우리나라는 잘못된 과거를 한 번도 제대로 청산한 적이 없다. 1948년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여 친일을 청산하려고 했다. 이승만은 특별조사위원회를 해체하고 친일 청산을 가로막았다. 박정희는 1961년과 1972년 친위 쿠데타로 국회를 해산하고 독재를 통한 종신 대통령을 노렸지만, 1979년 부하의 총에 맞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두환은 1979년과 1980년 군사 반란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제2의 박정희를 꿈꿨다. 이 역시 거센 민주화운동으로 좌절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민정당 세력과 손잡고 1992년 당선됐다. 그도 처음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벌할 마음이 없었다. 민심은 달랐다. 1995년 검찰이 5.18 내란 사건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공소권 없음을 결정하자 전국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결국 5.18 특별법은 제정됐고, 성공한 쿠데타도 반드시 처벌된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1996년 12월 전두환과 노태우는 2심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17년을 선고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두 사람은 역사의 단죄를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5월, 두 사람이 사죄하면 용서하겠다고 밝혔음에도 그들은 끝까지 사죄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되고 난 후 김영삼 대통령과 사면에 합의했다. 격동의 시대를 함께한 두 사람의 정치적 한계였다. 서로의 이득을 위해 정의를 포기한 나쁜 선례로 역사에 남았다. 만약 전두환과 노태우가 법원이 선고한 형을 끝까지 살았다면 우리나라의 정의는 바로 섰을지 모른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잘못된 정치적 결정이 위험한 이유다.




#역사의 채찍


12.3 내란 사태가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퇴보인 것은 분명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방위에서 후유증이 너무 크다. 얼마나 오래 그 빚을 넘어서야 할지 모른다. 이번만큼은 내란 수괴와 관련자들에 대해 용서를 베풀지 않고 엄벌해야 한다. 관용을 베풀면 안 된다. 다시는 이 땅에서 쿠데타를 시도하지 못하도록 역사의 채찍으로 남겨야 한다. 어설픈 용서와 관용은 또 다른 악마의 씨앗을 품게 한다.




#악의 평범성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유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계산하는 사유'와 '숙고하는 사유'다.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계산함을 넘어선 숙고함이 빠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런 전형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찾았다. 독재자 히틀러의 하수인이었던 아이히만은 치밀한 계산으로 홀로코스트라는 죄악을 저질렀지만 숙고하는 사유를 하지 못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인 사유를 망각한 것이다. 12.3 내란에 관련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안위와 출세를 위한 계산은 했을지 모르지만, 숙고할 줄 모르는 사유의 무능력이 그대로 노출됐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은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렇게 바꿔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2024년 12월 3일, 한국 민주주의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취임한 날.” 민주주의가 외롭지 않도록 깨어 있는 시민의 지혜를 발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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