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밴프(BANFF)지

by 오이향

어딘가 현실감 없는 여행에서 돌아왔다.

써서 남길까? 고민했다.


언젠가부터 여행에서 돌아오면 기억을 위한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 날까지 완성한 기록은 좀체 없다. 기억력에 끈기까지 없는 스타일이라.....

그래서 쓰지 않았더니 여행의 기억이 그 몇 날조차 남지 않았다. 계획에 없었던 짧은 패키지여행. 밴프는 그래서 더 꿈만 같다.


올해는 여러 가지로 어지러운 한 해다.

친하게 지내던 동료가 직장을 떠났고, 대학친구는 암선고를 받았고, 나는 평생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무시와 모욕을 받았다. 나이 들었어도 그건 받을 게 못된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 어떤 이유에서든 하지 말아야 할 표정과 말들이 있었다. 나도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와중에 매년 떠나기로 작정했던 장기 여행도 떠나지 못했고 앞으로의 계획도 불투명했다.

이럴 땐 무조건 떠나야 한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때에 우르르 몰려가는 곳엔 가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엔 여행하지 않는다는 나름 여행 철칙도 있다.

7, 8월 여행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지만 조금 시원한 곳으로 가면 어떨까? 하는 내 속에 타협안이 솟구쳤다.

캐나다 밴프는 록키산맥과 함께 트래킹이 아니면 떠나기 어려운 곳이란 인식이 있었다.

생각보다 짧은 기간에 저렴한 가격대의 상품이 인터넷 여기저기서 검색되었다.

마치 나를 노린 여행상품 같았다. 이 정도면 다녀올 수 있을 기간이었다.


누구와 동행할지 후보선수들을 떠올렸다.

가장 최선의 선택은 가장 거리가 먼 답을 소거해 나가는 방식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딸과의 여행을 앞둔 K, 남편과 일본여행을 계획한 S, 올해 들어 이미 친구들과 독일여행을 마친 Y, 다리골절로 병가를 들어간 M, 비행기 타기도 어려운 약골 친구 J.

모두 다 지웠다. 없다.


대학시절, 같은 학문을 배우겠다고 모였던 대학동기 모임이 생각났다. 모르는 사람과도 가는 마당에 친구들 중에 시간과 여행지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동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걸려든 친구와 여행을 시작했다.

급하게 정하기도 했고 각자의 일상이 바쁜 탓에 출발 전까지는 몰랐다. t-way항공이 저가항공이라는 사실을.

최소한의 항공정보도 알 수 없는 먹통시스템에 단 한 끼의 식사, 의자 등받이는 이 놈을 부숴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다뤄야 겨우 뒤로 넘어갔다.

닭장 속의 닭들이 생각났다. 평생을 이렇게 살다 간 닭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렇게 북위 49도의 밴쿠버에 도착했다.

54명의 단체 투어, 듣보잡이다.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넘어 닭장 속 닭들의 경지에 오르기 직전에 도착한 밴쿠버에서 처음 저녁을 먹은 곳이 "서울관"이다. 아이러니다.

이러려고 왔나 하는 생각도 잠시, 가게가 제법 고풍스럽고 음식은 맛나다. 역시 음식은 힐링이다.

불고기 전골에 소주 한잔을 얹어 마셨다. 함께 앉은 연배 있어 보이는 부부의 호의로 출발이 좋다.


캐나다는 우리나라 면적의 100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우리보다 적다. 몇 년 전 동부여행에서 들렀던 도시마다 작은 소도시의 느낌이 났던 기억이 난다.

숙소로 가기 전에 쇠락한 차이나타운을 스쳐지나 개스타운 스팀클락을 보러 갔다. 조금 실망했다.

아마도 장시간 비행의 닭장 경험으로 심신이 피로했기 때문일 것이다.

알래스카 크루즈의 출발점이라는 캐나다 플레이스와 스탠리 파크에서 밴쿠버의 첫날을 보냈다.


항상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란 기대를 한다.

나의 이 기록도 내일까지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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