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86 동기회' 스케치
86학번과 86년생들이 직장동료가 되었다. 가칭 '86 동기회'를 주장하며 만난 첫 모임.
두 명이 붙어야 부축이 되는 거구를 가게 밖으로 겨우 끌어낸 골목에는 생각지도 못한 벤치가 있다. 마치 거기 앉으라는 듯, 시장통 한가운데 벤치는 어딘가 생뚱맞다. 거구는 얼추 소주가 반인 특별제조 소맥을 마시고 인사불성 직전까지 가면서 한 명은 약을 사러 약국으로 뛰었다.
둘은 거구를 가게에서 끌어내며 이참에 아예 집에 보내버리고 2차 갈 생각에 행복하다. 그러나 거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기를 집까지 데려다 달란다. 이 밤에, 그 길이 어딘데 이리 당당한지, 그러나 거구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 아예 눈을 감는다. 방법이 없다. 2차는 거구의 집 앞에서 하기로 한다. 찬바람을 맞으니 좀 나아졌다는 거구를 다시 택시 안으로 밀어 넣는다. 멀고 먼 거구의 집으로 이동한다. 제발 정신줄은 놓지 말아야 할 텐데, 염원을 담아 다독인다.
거구는 자신의 방 안까지 자신을 들여다 주기를 원했다. 놀라운 일이다. 철들고 내 평생 만난 자들 중 단연 독보적이다. 아무리 술에 얽힌 뼈아픈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해도 이것은 우리의 86인연도 마지막임을 알리는 한 방이다.
먼 하늘 밑 맥주는 뭔가 다르다. 공기도 다른 ‘살얼음맥주집’에서 언젠가 꽃바구니로 마음 상한 각자의 이야기들로 한껏 이야기꽃을 피웠더니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해 가고 있다. 서둘러 탈출한 맥줏집 앞으로 택시가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너무 자연스러운 전개다.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간다. 집에서 멀리 온 탓에 마음이 급하다. 환승역이라 그 역에 가면 마지막 지하철을 탈 수도 있으리라 추측해 본다. 지하도로 접어드니 멀리 들리는 안내방송. 분위기상 마지막 지하철의 도착을 알리는 내용일 것이다. 냅다 뛰어 지하철을 탄다. 그래도 막차라 그런지 역내 체류 시간이 길다. 다행이다.
지하철에서 자는 X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정신을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 본다. 다행히 정확한 하차로 이어지고 아파트와 연결된 육교를 건너는데 평소와 어딘가 다르다. 밤이 몹시 밝은 것이 뭔가 색다르다. 마침 우레탄 바닥 교체 공사 중이었는데 마무리가 되었나 보다. 노란색 보행로가 한결 따뜻하고 편안한 밤을 만든다. 아름다운 밤이다.
아침에 출근해 어제의 일들을 돌이켜 본다. 갑자기 나타난 생뚱맞은 벤치에, 시간 맞춰 나타난 택시, 미로 같은 지하철 환승역에서 나를 기다려준 지하철,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을 밝혀 준 노란색 우레탄 육교길,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준비된 세트장은 아니었을까? 한밤의 트루먼쇼 같다.
그렇게 ‘어쩌다 86 동기회’는 아름다운 기억만 남기고 기약 없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