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 함부로 시작 맙시다.

모든 일엔 때가 있다.

by 오이향

한 동안 나는 인생의 화두로 사회공헌이라는 네 글자에 꼽혔던 적 있었다.


왠지 무겁게 보이는 이 네 글자에 가볍게 접근할 방법으로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한 모자 뜨기에 도전했다. 매년 12월이 다가오면 모자 뜨기 키트를 구입하고 그해 겨울 동안 조금씩 떠서 완성된 손뜨개 모자는 아프리카 모처로 보내지곤 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제법 뿌듯하게 해 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정례적인 일이 되면 차츰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그해도 기계적으로 키트를 구입했고 서랍 속에 넣어 둔 채 모자를 보내야 할 일정이 마냥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시기를 놓치고 다음 해를 기약해 버린 후 꼽아보니 벌써 9년째가 되었다.


공간개념이 누구보다 탁월한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다. 어디든 자투리 공간에 차곡차곡 채우기에 최적화된 두뇌를 가졌다고나 할까? 9년간 서랍을 정리하는 날도 꽤 있었지만 모자 뜨기 키트는 요리조리 빈 공간을 채우면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모든 일은 끝이 있는 법,

드디어 나는 다시 모자 뜨기, 그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뜨개실은 키트를 살 때 랜덤으로 온다. 마음을 먹고 보니 실 색깔이 눈에 들어왔다.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보낼 뜨거운 마음 레드, 그와 별로 안 어울리는 핑크, 특색 없는 오트밀 색, 3종이다. 신생아가 색감에 아직 눈뜨기 전인 것이 천만다행이다.


모자 뜨기 키트를 구입했던 복지기관 홈피에 접속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이 사업은 이미 종료되었다는 공지가 떠 있었다. 너무 늦게 먹은 마음이 갈바를 잃었다. 홈페이지에는 그 간의 실적을 숫자로 정리한 마지막 페이지가 떠있었다. 그 수치 속에 몇 해에 걸쳐 만들어 보냈던 내 모자들도 어른거리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그것도 잠시, 이제 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3가지 색의 실타래와 신생아 머리둘레에 맞춘 모자 뜨기 설명서만 남았다.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대바늘 뜨기는 여고시절 기초만 배워 목도리 정도 떠 본 게 전부다. 그것도 너무 오래된 일이다. 9년을 보관한 실타래 치고 실 꼬리가 너무도 정갈하게 빠져나와 있었던 게 화근이다.

차라리 내 모자라도 떠볼까?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유튜브 선생에게 모자 뜨는 법을 묻기로 했다. 대바늘 코 만드는 법부터 찾아보았다. 어느 정도 기억을 되살린 후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뜨면 초보지만 될 듯도 했다. 원통형으로 떠 올려서 한쪽을 묶고 방울을 다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어쩐지 제법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유튜브에서 본 영상이 머리에서 사라지기 전에 얼른 코를 만들기 시작했다. 섣불리 시작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만들기에는 빼놓은 실이 충분치 않았음을 알았다. 실을 풀고 다시 조금 더 길게 빼고 시작했지만 실은 계속 계속 짧았다. 대바늘 뜨기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일단 밑단 코를 만들고 거기서 통으로 떠 올려야 하는데 내 머리가 들어갈 정도로 적당한 크기의 원통을 만들어야 한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대충의 크기를 가늠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 잡아 제법 넉넉히 실을 잡고 다시 뜨기 시작했지만 결과는 신생아용 모자코의 반 밖에 안 나왔다.

실에서 대바늘을 다시 빼고 또 풀었다. 이게 몇 번째인가.


이젠 조금 신중하게 생각해 제법 길다 싶게 실을 빼놓고 다시 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코를 만들어 갈수록 이것도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설명서에는 신생아 머리둘레에 맞도록 86개 코를 만들라고 했는데 만들고 보니 겨우 90개 밖에 안 되는 것이 아무래도 내 머리의 반 밖에 가리지 못할 폭이다. 망설였지만 답이 없었다. 다시 풀었다. 7~8번 풀었나?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이쯤 되면 숨을 크게 한번 몰아 쉬어야 한다.


이젠 원 없이 실을 풀어 잡았다. 다시는 만든 코를 풀 일이 없어야 한다는 각오로 뜨개를 시작했다. 신생아 머리에 비하면 2배 정도는 되어야겠지? 하는 엉뚱한 믿음으로 드디어 밑단 코를 넉넉하게 완성했다.

다음 날 저녁부터는 몸통을 떠 올리기 시작했다. 하루에 몇 단씩 떠 올리면서 몇 날은 애틋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점점 이상한 것이 모자를 떠 올라가면 갈수록 폭이 점점 넓어지는 것이다. 착각이길 바랐다.


'뭐지? 더 이상 나는 실 따위 풀 수 없는데...... '

'모자, 뭐 좀 넓게 쓰면 되지. 조금 주름이 잡히면 어때?' 하는 마음으로 몇 날 밤 시간을 내어 한 땀 한 땀 모자를 완성해 갔다. 드디어 머리가 들어갈 정도의 깊이로 얼추 완성된 것 같았다.


머리에 써 보았다. 예상과는 달랐다. 이것은 모자라기보다 세숫대야에 가까운 크기였다.

방울은 달지 않았다. 원통이 너무 넓어 도저히 모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주인이 아니었던 나에겐 허락되지 않은 모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9년 전 시작됐던 내 모자 뜨기는 밑 없는 세숫대야를 하나 뜨고 막을 내렸다.


뭐든 녹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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