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프(BANFF)의 낯선 밤, 낯선 우리

3일 차

by 오이향

나의 물질세계 속에서 가장 깊은 곳은 가방이고, 가장 넓은 곳은 침대다. 물건들이 가방 안으로만 들어가면 도대체 찾을 수가 없다. 미궁으로 빠진다. 침대도 그렇다. 핸드폰과 리모컨은 팔을 돌려 찾을 수 있는 사정권 내 두고 잔다. 누워서 반수면 상태에서도 자유자재로 사용하려는 의도다. 웬걸? 어쩐 일인지 항상 찾지 못해 잠을 깨곤 한다. 가방은 기어코 털어 엎어야 민낯을 드러내고, 휑하니 숨을 곳 하나 없는 침대는 나를 기필코 잠에서 깨워야만 숨긴 그 무언가를 보여 준다. 아마도 내 인생의 반은 뭔가 찾아 헤매는데 시간을 허비할 것이다.


기필코 완성하고야 말리라는 다짐으로 3일 차 여행 기록을 위해 핸드폰 메모장을 열었다. 짧은 단어들과 시간들, 알 수 없는 현지 지명이 쏟아졌다. 몇 주 지났다고 도대체 뭔 소린지 알 수가 없다. 사진이 찍힌 구글 지도를 띄워보고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고 사진과 단어를 연결해 본다. 물건도 찾지 못하더니 기억도 찾지 못해 한참을 명상 아닌 명상도 해본다. 그렇게라도 기억이 나면 치매는 아니라니 다행이다.


여행 3일 차, 새벽부터 서둘렀다. 숙소에 단체여행팀이 많은 관계로 어느 팀보다 이른 식사를 하기로 했다. 우리는 뭐든 빨리하는 일은 자신 있는 민족 아닌가. 그런데 호텔 조식을 위한 자리다툼이 생길 줄이야. 자리를 먼저 확보하려던 우리 팀 가이드를 향해 중국 아줌마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영어로 싸울 줄 아는 게 부러웠다. 공간을 뒤흔드는 목청, 저것은 대륙의 기질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분이 많이 상하신 듯하나 화를 처리하는 방식은 글로벌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 고함소리가 귀에 쟁쟁한 채, 드디어 출발. 오늘은 200만 개가 넘는다는 캐나다 호수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는 날이다. 록키산맥 3대 호수 중 첫 호수는 요호국립공원의 에메랄드 호수다. 빙하가 쓸고 내려온 퇴적물의 어떤 성분 때문에 에메랄드빛이 난다고 했으나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겠다.

두 번째 모레인 호수는 산길을 조금 올라서자 갑자기 나타났다. 선호도 1위의 호수답게 호수를 둘러싼 10개의 봉우리, 텐픽과 함께 장관이다. 넋 놓고 앉으면 여기서는 무한정 있을 수 있겠다 싶다. 세 번째 호수는 세계 10대 절경이라는 루이스레이크다. 호수 주변으로 뷰가 좋은 호텔은 1박에 250만 원이란다. 같은 하늘 아래 별천지에 사는 사람이 많다.


보우강과 보우폭포도 지나고, 옵션으로 선택한 곤돌라를 타고 Mt. Sulphur(설퍼산) 정상에 올랐다. 가이드가 침을 튀기며 맛자랑을 하던 정상 뷔페에서 약간 이른 저녁을 먹었다. 한 기대 탓인지 점심을 캐나다의 청정자연이 키워낸 소고기, 알버타 스테이크로 먹은 탓인지 연 이는 고기 메뉴에 약간 질리긴 했다. 그래도 오늘은 밴프에서의 하룻밤이 예정된 날이니 괜찮다. 뭐든.


밴프의 숙소들은 규모가 작아 일행은 3군데로 나눠졌다. 중심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우리들 숙소는 Rundle Stone Rounge.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나름 깨끗한 관리에 고풍스러운 로비가 좋다.

치기 어린 소년들처럼 쏘다니려는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할 일 없이 어슬렁 거려 본적이 언젠가 싶다. 제법 거리를 걸어 어느 펍에 들렀다. 2층에서 도로를 보며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잡았다. 추위가 일상이 된 마을이선지 머리 위로 설치된 난로의 따뜻한 기운이 얼굴에 쏟아진다. 맥주 테이스팅까지 야무지게 하고 한잔씩 선택해 마시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공간이 주는 위로는 참으로 대단하다. 설산에 둘러 쌓인 동네 밴프에서 어스름한 저녁을 맞는다는 건 3대가 쌓은 공덕이 아니면 있을 수 없다. 비록 내가 3대째 기독교 집안의 딸이긴 하지만. 내가 뭘 하던 사람이었는지 잊게 만든 저녁, 이것이 공간의 힘이다.


10시를 넘기고 거리가 어둑해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밴프로 선뜻 동행해 준 친구에게 큰소리로 감사의 말을 전하며 맥주값을 계산했다. 불 꺼진 상점들 사이로 걷다가 노란색으로 발광하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다. 줄 서는 아이스크림집이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떠오른다. 아직도 줄이 문밖으로 꼬리를 빼고 있지만 결코 지나칠 수 없다.

친구가 답례로 아이스크림은 자신이 사겠다며 호기롭게 줄을 섰다. ‘Cows’ 근데 맥주보다 아이스크림이 더 비쌌다.

뭐지?


한 여름밤, 밴프에선 아이스크림 몇 숟갈에 한기가 온다. 추워서 숙소까지 비싼 아이스크림 컵을 각자 들고뛰었다. 우리 밴프에서 가지가지하고 있다. 맥주보다 비싼 컵아이스크림, 낯선 것들에 한껏 즐거워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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