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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영 Nov 25. 2019

유행에 민감해서 그만

 나도 퇴사라는 걸 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네, 자네가 유행에 꽤 민감하다는 걸 아는가? 그래서 자네가 요가도 하고 서핑도 하고, 차도 마시는 거 아니겠나."라고. 아하, 그렇군요! 그게 유행인지 몰랐어요. 저는 BTS나 흑당버블티 같은 게 유행인 줄 알았죠. 이제라도 제가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돼서 참 다행이에요. 그래서 말인데요,







 저도 퇴사 좀 해보겠습니다. 요즘 퇴사가 유행이잖아요.







 물론 이건 우스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5년 넘게 일해온 회사에서 퇴사를 결심하고 내 의사를 상사와 팀원들에게 전하는 일은 그리 웃기지도 않았다. 조심스럽게 꺼낸다고 꺼낸 말의 타이밍은 썩 좋지 않았고, 그 말을 들은 팀장님은 아무리 훌륭한 상사라지만 당황과 상심, 응원의 복합적인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후에 더 어른인 상사님께서는 '좋은 타이밍'이라는 게 애당초 없다고 하셨다.) 모두가 일당백 하며 서로를 버팀목 삼아 견뎌온 터라 무엇보다 팀원들의 사기와 업무량이 걱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데, 그들은 어째서 나를 더 위로하고 격려한 건지. 모르긴 몰라도 인복은 타고났다.







 사랑하는 팀원들과 두둑한 월급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지만, 퇴사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이 힘들어서다. 구체적으로 뭐가 그렇게 힘들었나 다시 복기해보자.


 누군가는 늘 틀에 박힌 일만 해서 힘들 수 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에 더 이상 동기부여가 안 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나를 끌어줄 사람이 없어서, 영감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힘들 수도 있다. 혹은 직장 상사나 조직원들과 맞지 않아 힘들 수도 있다. 또라이와 맞서 싸우다 작렬히 전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 명백한 퇴사 사유가 된다고 본다.


 여러 이야기를 주변으로부터 들으며 '역시, 저 사람 보단 내 상황이 좋지.' 라거나 '다들 힘드니까.' 라며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라는 인간에게 그런 생각은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퇴사를 결심하기 전의 내 상황은 이랬다. 우선 물리적으로 일이 많았다. 일이 없는 것보다야 많은 게 낫긴 하지만, 오랜 시간 100을 꽉 채워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과부하에 걸렸다. 매일 뜨는 해처럼 나보다 성실한 업무가 아침마다 비몽사몽인 내 뺨을 때리며 이래라저래라 일 해라 절 해라 영원히 내 꽁무니를 좇는다니. 생각만으로도 숨 막혔다.


 업계 선두를 달리는 IT회사에 다니며 그까짓 거 극복할 열정은 탑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젊음의 열정과 회사에 대한 애정만으로 안 되는 게 있었다.






 10년 넘게 나를 따라다닌 '디자이너'라는 이름의 직업과 나의 관계. 그 서먹함.







 그렇다. 디자인 자체에 희열을 느꼈다면 회사를 관둘 8할 정도의 이유가 사라졌을 거다. 퇴사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내가 몸담았던 회사는 디자인 기여도(혹은 의존도)가 높았을 뿐 아니라 디자이너가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지원해주는 곳이었다. 자연히 디자이너의 이직률도 낮았다.


 이런 분위기라 쫄보인 나는 되려 오랜 시간 겁먹고 일했다. 부끄럽지만 솔직한 이야기다. 아니 어쩌면, 내가 '디자인'을 너무 신줏단지 모시듯 모셔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언제나 재미보다 괴로움을 벗삼았으니까. 지칠 만도 했다.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 표정은 가감 없이 괴로움을 표출했다. 건강할 때의 나와 그렇지 못할 때의 나, 그 밝음과 어둠의 격차는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표정관리만 잘했어도 회사 생활에 특화됐다 생각하며 더 다녔을 텐데. 그것 조차 안 되다니. 그런 내 모습에 주변 사람들까지 영향받으니 판단은 오히려 쉬워졌다.







 '그만둬야지. 안 그래도 허한 몸인데 곪은 살이 이렇게 커서야 되겠나. 아무리 인력이 부족해도, 내가 남아있는 게 더 속 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쯤 생각하니 내가 진짜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게 떠올랐다. '과연 나는 다른 일을 힘 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어떤 일을 해도 힘이 잔뜩 들어가는 부류일지도 모른다. 디자인을 해서 괴로웠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럴지언정


 나는 나를 더 잘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기꺼이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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