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뇌종양 개두술 후

by 김재인

”퇴원하면 뭐부터 하고 싶어?“ 여자 친구가 물었다.

나는 바로 “맛있는 요리 해 먹고 싶어”라 답했다. 평소 요리와 운동을 즐겨하기 때문에 오히려 병실에서 가만히 있는 주말이 너무 힘들었다. 요리를 배운 건 아니지만 대학생 때부터 취미로 요리를 해 나름 자부심이 있기도 했고 고생한 여자 친구에게 뭐 라도 보답하고 싶었기에 퇴원하자마자 저녁에 냉장고를 확인했고, 있는 재료로 ‘문어 파스타’를 요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데이트’라 했어야 했나 싶다.


응급실에서 퇴원할 때 Levetiracetam라 불리는 발작환자에게 처방되는 항간질제를 처방받았다. Keppra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전혀 다른 발음인데 왜 저렇게 발음하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살짝 의아하다. 오전, 오후 8시에 각각 500mg씩 복용하는데 이유는 약 효과가 12시간 만 지속돼서 24시간 효과를 보려면 하루에 2정씩은 복용해야 하는데, 경구제라서 영양제처럼 복용하면 된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 말로는 평생 복용해야 할 거라고. 캐나다는 Family Doctor라 해서 가정의 선생님을 지정, 진료를 보곤 하는데 워낙 한 사람이 담당해야 하는 환자 수도 많거니와 그에 걸맞은 봉급도 받지 못해 대부분 미국으로 많이 빠져나간다. 때문에 가정의 선생님을 구하는 거부터가 상당히 어렵다.


한번 병원에 갈 때마다 지정된 가정의 선생님이나 담당 전문의 선생님들이 처방전(Prescription)을 써주고 방문할 때마다 세 달치 정도의 약을 주는데 평생 복용하는 거는 괜찮지만 매번 처방전 받으러 가야 하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래도 무료인 게 다행이지 싶다. 당시 나는 토론토에서 아직 담당 가정의 선생님이 없어 외래 갈 때마다 전문의 선생님에게 부탁하곤 한다. Keppra는 발작 증세를 완화시켜주기도 하지만 부작용이 있다. 극에 달하면 자살 시도, 충동과 같은 우울증과 졸음, 피로, 협조운동장애 가 대표적이라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경험하지 못했고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다. 워낙 내가 마주한 현 상황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정도로 성격이 많이 무뎌지기도 했고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을 때라서 평소와 같이 생활했다. 평범하게 데이트, 영화/드라마/예능 보기, 운동을 하며 보냈다. 무리한 운동은 뇌압을 올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당분간 가벼운 무게로 운동을 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로 주 3회, 무게도 반만 하는 거로 여자친구와 합의했다.


사보험이 있어서 보험사 측과 상담해 본 결과 120일 이내로 복귀할 거 같아서 우선 단기 장애 보험(Short Term Disability Insurance)을 신청했다. 장기 장애 보험과 같은 경우 질병으로 인해 120일 이상 2년 미만으로 자리를 비우게 될 경우에만 신청이 가능하다. 사보험은 소득공제 대상이고 개인정보, 담당의사소견서, 고용주 확인서 등을 제출했고 신청하고 나서 6주 후에 주급의 약 67% 되는 금액을 매주 금요일에 지급받을 수 있었다. 보험사로부터 지급되는 돈은 토론토의 미친 물가와 월세를 감당할 수 있게 도와줬다. 발작을 일으킨 지 2주가량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간호사가 휴대폰 너머로 말했다.


“2022년 5월 30일 오전 8시에 수술이 잡혔으니 2시간 전까지 Sunnybrook 병원 내 수술 대기실로 오시면 됩니다.”


한국 같은 경우에는 뇌종양을 발견하고 수술 날짜가 잡히기까지 몇 달은 걸린다는데 운이 좋게도 나는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수술 날짜가 오래 걸렸다면 수개월간 다시 발작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을 것이고 운동도 제대로 못할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당일 이메일과 우편으로 수술에 대한 전반적인 주의사항에 대해 고지가 날아왔다. 코로나 때문에 병상이 없는 것인지 입원 없이 출근하듯이 수술받으러 직접 갔어야 했다, 수술 전 감염 위험을 줄이기 위해 Scurb-Stat 4%라는 7달러 정도의 액체 소독 비누를 수술 전날 1회, 오전에 1회 사용해서 몸을 세척하라고 기입되어 있어 설명서에 맞게 이행했다. 캐나다는 신기하게도 수술도 출퇴근제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나서 부모님은 물론이고 걱정하고 있을 친척들에게도 알렸다. 여느 수술이 그렇듯 3% 미만으로 사망하거나 뇌사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해서 수술 전날 새벽 여자친구가 잠에 들어서야 작은 방에 있던 줄 종이를 가지런히 찢어 유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참고로 내 MBTI는 ESFJ로 J답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 계획해 놓는 것을 선호한다. 사실은 수술이 잘못될 까봐 걱정이 돼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졸업 이후로 긴 글은 처음 써보는 것이기도 하고 처음 쓰는 유서이기 때문에 어색하긴 했지만 팬을 쥐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여자친구에게 먼저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때가 한국에서 결혼하기 딱 5개월 전이었는데, 이미 예식장까지 예약해 놨을 때 병간호까지 하게 하고 미안함이 컸다. 다 적고 나니 여자친구에게 4장, 동생에게 2장, 부모님에게 1장 분량 정도를 썼다. 현실적으로 작성했다. 얼마 있지도 않은 재산을 어떻게 할지, 사망 보험금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또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유서 7장을 가로로 세 등분으로 각 잡아서 접고 수술실에 가져간 배낭 안쪽 주머니에 고스란히 넣어 놨다.


유서를 쓰고 나서야 3시쯤 얕은 잠을 잘 수 있었고 한 시간 후 일어나 액체 비누로 몸을 씻었다. 이른 아침부터 여자친구와 수술 진행상황을 알 수 있는 대기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난 수술실 앞 복도로 옮겨졌고 마취과 의사 선생님과 알레르기는 없는지에 대한 짧은 대화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자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낯익은 외과의사 얼굴을 마지막으로 마취약에 취해 잠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외과의사로 30대의 젊은 동양 여성을 선호한다고 여자친구와 농담조로 얘기를 했는데, 마침 딱 30대 중국계 여성인 냉철한 집도의를 마주해서 속으로 ‘우주가 나를 돕는구나’ 싶었다.


캐나다는 여전히 코로나 영향을 받고 있어서 더욱 조심해야 하는 병원에는 환자 외 1인만 동반 출입이 가능했다. 때문에 나는 먼 곳에 사는 가족들보다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같이 사는 여자친구가 더 편할 거 같아 병간호를 부탁했다. 오전 8시에 들어간 수술이 눈을 떠보니 오후 3시를 향해 있었다. 여자친구는 3시간이라고 했던 수술 예상 시간이 5시간이 지나서도 끝나지 않자 엄청 초조했다고 한다. 수술은 다행히 잘 끝났다. 하지만 예상 못했던 문제가 있었는데, 수술 후 8인 정도가 중환자실에서 대기를 하게 되는데 아직 코로나가 심할 때라서 수술자 외에는 출입을 못하게 돼있다. 캐나다 중환자실은 인터넷도 되지 않거니와 와이파이도 차단 돼있는 데, 아무래도 극도의 안정이 필요한 환자들을 생각해서 그러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수간호사님이 무전기로 여자친구를 불러줬고 울어서 퉁퉁 부은 그녀를 마주하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여자친구를 보자 반가운 마음에 말을 하려는데 ‘어…어…어…’만 반복하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취에서 덜 깬 것일까. 여자친구는 집도의 선생님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고 뇌에 언어기능을 담당하는 부분 일부를 제거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실어증까지 겪게 된다니 그렇지 않아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반대로 백지처럼 새하얘지는 순간이었다. 우선 수술은 잘 됐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면회 시간에 제한이 있어 여자친구는 집으로 돌아갔다.

중환자실에서 여자친구가 가족들에게 보낼용으로 찍은 사진

중환자실에서 어느 정도의 회복할 시간을 갖고 뇌병동 내 4인실로 이송되어 다른 뇌 수술을 받은 환우들과 병실을 공유했다. 수술 직후에는 두개골에 4cm가량의 구멍이 나있는 듯한 감각이 들었고 그 상태에서 뇌가 빠져나올 것만 같았다. 맥박에 균일하게 박동하는 것을 뇌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릴 때마다 뇌가 쏠리는 느낌도 났기 때문에 움직임을 최소화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이유로 수술한 당일 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중증환자들은 아래 사진과 같은 재활용 종이로 만들어진 1리터짜리의 남성용 오줌 받이를 주는데 누운 상태에서 해결하려니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도 마시지 않았는데 어찌나 소변이 많이 나오던지, 소변볼 때마다 매번 흘러넘쳤고 넘칠 때마다 간호사님이 침구를 재정비해줬다. 하루빨리 찝찝한 소변통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치욕스럽고 민망했다기 보단 종이 재질이라 축축 해지고 넘칠까 봐 조마조마했던 게 불편했고 간호사님이 침구를 갈아 주긴 하지만 고무 재질의 침대 위에 종이 시트만 올려주는 격이라 필사적으로 소변통 생활을 청산하고자 애썼다.

남성용 오줌 받이

다음날이 되자 실어증은 전날에 비해 더욱 악화됐고 의사 선생님이 들어와 앞으로 힘든 재활이 될 것이라고 했다. 완벽하게 언어를 구사하진 못하겠지만 결국에는 돌아올 것이라는 말과 함께. 정신과 언어가 따로 놀았다. 말은 물론이고 글쓰기도 어려웠다. 되던 것이 되지 않자 괴롭고 답답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재활이구나 싶었다. ‘아빠’를 쓰려고 하는데 ‘엄마’가 써진다거나, 배고프다고 말을 하고 싶지만 ‘사랑해요’라고 말이 나오기도 했다. 뭐 평소 하지 못하던 말인데 자연스럽게 나와서 묻어갈 수 있었다. 띄어쓰기도 되지 않고 글씨가 불 붙여놓은 촛농 마냥 흘러내려갔다. 문자는 짧은 문장을 완성하기까지 몇 주나 걸렸다. 섬망 증세가 있어 간호사님이 들어올 때마다 내 이름, 생년월일, 오늘 날짜, 현 장소를 물어보는데 이름 외에는 답할 수 없었다. 제대로 대답하기까지 몇 주가 걸렸다. 이땐 익숙한 노트북 비밀번호 네 자리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체감상 뇌 박동과 쏠림은 점차 줄어들었고 2시간가량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글 쓰기 연습

수술한 지 이틀 째, 여자친구가 출장 겸 3년간 코로나로 인해 못 봤던 부모님을 뵈러 LA에 갔다. 여자친구 부모님은 한국에 계셨지만 당시 LA로 출장 오실 용무가 있으셔서 중간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미 쓰러지기 전부터 계획된 일정이고 비행기 타기 전 잠시 병원에 들렀을 때도 옆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내가 쓰러지고 나서 몸과 마음고생을 한 여자친구에게 어눌한 말과 몸짓으로 제발 가달라고 했다. 가서 좀 쉬고 오라고. 여자친구 부모님께도 아픈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던 사실이 힘들었다. 같은 날 오후 오타와에서 부모님과 동생이 와서 내 현재 상황에 대해서 인계받았다.


가족들은 매일 점심, 저녁 도시락을 싸왔다. 캐나다는 한국에 비하면 환자식이 양도 적고 정말 형편없게 나온다. 환자식이 싫어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병원 로비에 프랜차이즈 식당이 있지만 일찍 문 닫을뿐더러 맛이 없다. 외부 음식도 가져올 수 있다고 해서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고 아버지와 동생은 배달을 해줬다. 이때부턴 휠체어를 뒤에서 누군가 끌어주면 병원 로비 정도는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병원 로비에서 세 가족이 모여 내가 밥 먹는 것을 구경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입맛이 없어 몇 숟가락 들지 못하고 포기했다. 코로나 때문에 동생만 병실 출입이 가능했고 이 마저도 8시로 제한이 돼있었다. 이날부터는 소변통과 작별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좌변기로 가는 것은 가능했다. 8시 이후에는 병실 복도 난간을 붙잡고 10m가량을 오고 가며 가벼운 산책을 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여자친구가 LA에 있는 동안 했던 수많은 통화 중 하나는 기억이 난다. 평소 감정을 많이 숨기는 편이지만 평생 말을 못 할 것과 같은 두려움과 답답함, 여자친구와 미래를 그렸던 미안함에 감정이 복받쳐 되지도 않는 말을 구사하며 목 놓아 울었다. 그때만큼은 절박하고 간절했고, 결혼할 여자친구를 놔줘야 하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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