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집으로, 재택 재활과 여름

by 김재인

6주 정도의 짧지만 길게 느껴진 재활 병동에서의 퇴원 수속을 마치고 당시 좋은 소식이라고 해서 모든 병이 완치된 것만 같이 들뜬 마음으로 Sunnybrook 병원으로 향했다. 뇌신경 의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수술은 잘 마무리 됐으며 수술 직후 촬영한 MRI에서도 별 다른 문제점을 찾지 못했을뿐더러 그나마 착한? 암이라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분기별로 추적검사를 통해 재발 시 그에 적합한 항암화학이나 방사선 요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모든 환자들이 큰 병을 치르고 나면 질문하는 것이 기대수명이다. 사실 진작에 물어보고 싶었으나 쓰러진 이후 경황도 없고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술 직후 구글 검색도 했으나 생각보다 짧은 기대수명에 전문의로부터 정확한 의견을 듣고 싶었다.

“제가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어눌한 영어로 질문을 했다. 의사 선생님은 구글 차갑게 7~10년을, 언젠가는 예외 없이 재발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검색하며 기재되었던 수치 그대로였다. 만 30살이었을 때니까 짧으면 37살, 길어야 40살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진행해도 좋을 거 같다고 했다. 이게 바로 서양인 마인드 인가 싶었다. 그때부터 여자친구는 휴대폰 노트 빼곡하게 준비한 질문도 하지 못한 채 울기 시작했고 당시 나는 뒷 통수 맞은 거처럼 여자친구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토닥 진정시켰다. 뇌신경 의사 선생님은 좋은 소식이라 불렀는데 여자친구에게 왜 슬퍼하냐고 물었다.

“좋은 소식은 개뿔…”

마음속으로 넌지시 뱉었다. 나는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자 밖으로 나와 택시를 불렀다. 원체 눈물도 없거니와 당사자라 그런 건지 눈물도 없고 무덤덤했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친구는 안겨 말했다.

“오빠 어떡해, 왜 안 울어, 슬프면 울어도 괜찮으니까 울어.”

그 와중에 택시가 도착했는데, 택시 기사님이 누가 죽었냐고 눈치 없이 재차 물었다. 그 정도로 여자친구는 오열을 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미동 없이 이동했다. 우리는 집에 도착했고 나는 거실 식탁에 앉아 한참 먼 곳을 응시했다. 여자친구는 방에 들어가 계속 울었다. 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나는 여자친구가 이별을 원하더라도 충분히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미 그녀가 너무 많이 고생한 것을 아는 나로서는 그녀의 결단에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이 되고 여자친구는 내게 와서 마음의 결단을 내렸는지 말했다.

“괜찮아, 오빠. 같이 이겨내면 돼.”

그 말이 듣고 싶은 거였는지, 미안함이었는지 혼란스러웠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옥이 있다면 여기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6월 끝자락을 슬픔에 갇혀 지냈다. 세상이 무너져 내렸고 어릴 때부터 크고 작은 병이 많았기 때문에 "내 몸은 왜 이렇게 허약할까"라며 자책했다. 반면, 여자친구는 계속해서 날 위로했다. 바로 다음 날 “여자친구도 힘내 주는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더 고생시키기 싫었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라고 결심해서, 집안일이라도 돕기 위해 냄비에 물을 받아 올렸다. 메뉴는 정말 간단한 ‘인스턴트 비빔면’이었다. 평소 요리를 좋아하는 나에겐 물을 끓이고 싱크대에 뜰채로 면만 거르면 되는 정말 간단한 과정이었다. 냄비 물을 끓고 튀김 냉각된 비빔면 덩어리를 넣고 봉지에 적혀있는 시간이 지나자, 왼손에 들고 있던 끓은 물에 있던 면을 뜰채를 들고 있던 오른손에 5초가량 부어버렸다. 굳이 떡 하니 보이는 뜰채를 두고 어째서 오른손에 부었는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인지 능력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랬던 거 같다. 뜨거운 것을 인지는 하고 있는데 몸은 마음과는 달리 손을 빼지 못했다. 작업치료에서 당분간 요리, 빨래 등은 혼자 하지 말라고 강조했었는데 꼴좋게도 퇴원하고 바로 다음날 사고를 친 것이다. 뇌도 몸도 고장 났다. 난 근처 약국에서 화상 연고를 사 와 발랐고 나중에 확인해 보니 물집이 잡혀 있었다.


같은 날 오후 미리 예약해 뒀던 미용실로 향했다. 가장 설렜던 순간이라 화상 입은 것도 모른 채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동안 의사 선생님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오지 말라고 해서 한 달 반 동안 강제적으로 정말 우습고 하찮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완벽한 반삭을 할 수 있었다. 상처 부위는 조심했어야 했기 때문에 샴푸와 두피 마사지는 정중히 거절하고 마침내 친동생이 재활 내내 주야장천 말하던 2mm 군인 스타일 반삭을 했다. 자르고 보니 흡사 나이키 로고가 떠오른 건 나뿐일까.

"Just Do It"

Nike

당분간 혼자서는 요리는 물론이고 빨래, 대중교통 이용, 운동까지 하지 말라던 재활 병원 의사 선생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운동만큼은 놓고 싶지 않았던 나는 "Just Do it"을 시전 했다. 여자친구와 함께 콘도에 있는 헬스장에 갔고, 평소 운동과 친하지 않은 여자친구는 고맙게도 허락을 해줬다. 그래도 혼자 두기에는 불안했는지 "이김에 운동하면 돼"라며 해맑게 웃으며 같이 했다. 운동에 이렇게 집착한 이유는 근손실도 그렇지만 평소 어느 정도 체계화된 생활을 선호하는데 무너지는 느낌이 드는 게 싫었다. 유산소 위주와 기존 무게의 3분의 1인 비교적 가볍게 적은 무게를 고반복으로 천천히 운동을 시작했다. 러닝 머신은 아직 머리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자전거를 15분가량 탔다. 진정한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 다지만 난 장인이 아니기 때문에 운동의 효율성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운동은 헬스장에서 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철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체감할 수 있는 근성장은 더더욱 미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Goodlife Fitness 헬스장을 가기에는 쓰러질 때 있던 트레이너들과 사람들의 이목을 끌 거 같기도 해서 당분간은 갈 생각이 안 들었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영화 대부에서 나온 대사다. 내 병에 대해 보다 더 잘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네이버 카페, '뇌종양으로 투병하는 사람들(뇌투사)'에 회원가입 신청을 했다. 당시 회원수 5만 명 정도로 뇌 관련 병원 정보, 의사 선생님 후기, 투병 및 간병 이야기 등 회원 간의 교류가 활발했고 실제로 도움 될 만한 정보도 많아서 자주 방문했다. 캐나다의 짧은 여름은 아프고 치열하게 재활을 하곤 있어도 남이 생각했을 때는 "금수저 중국인 백수인가" 싶을 정도로 알차게 보내려 애썼다. 아파트 수영장에서 태닝 하며 수영도 하고, 못 읽던 책도 읽으며 아무 생각 없이 한량처럼 세상만사 아무 걱정 없이. 여자친구와 못한 데이트도 하며.


나중에 친한 부부가 아는 뇌전문 의사 선생님이 있다 해서 기대수명에 관해 물어봤는데, 오래된 통계이기도 하고, 7~10년은 정말 극단적인 수치며 주로 노년층이 많이 겪기 때문에 30년 이상까지도 생존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해줬다. 나를 포함해 여자친구와 가족, 친구들은 이 말을 듣고 정말 안심했다. 정신 차리기까지 4일 정도가 걸렸다. 내가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강해져야 곁에서 지켜주기로 큰 결단한 여자친구도 흔들리지 않을 거 같았달까. 당시, 롤드컵과 월드컵이 한창이었을 땐데, 역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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