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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바트로스 Jul 24. 2024

5. 재수 통보받은, 초등5학년 아이

19세기 불문학사 시간

간간이 알아듣는 낱말로 만든 엉성한 발판, 그 위에서 춤추는 신참 곡예사처럼 혼신의 힘으로 버티는 100분은, 나를 초주검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20분간 휴식이다. 살 것 같다! 절망의 신음과 해방의 탄성이 뒤엉킨 한숨 소리가, 후우우~! 긴 잠수를 마치고, 수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해녀의 단말마 같은 커다란 숨소리가 터져 나와 버린 것이다. 아뿔싸! 하고 뒤돌아본 순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 짓는 다갈색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치자 너무 부끄러웠다. 당황한 나머지, 나도 덩달아서 겸연쩍게 웃고 나서, 얼른 고개를 되돌렸다.      

20분 뒤, 다시 이어진 강의는 과제물 제출에 관한 부연 설명으로 마무리됐다. 지금, 용기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다. 누구라도 붙들고, 잘 알아들었는지 과제내용을 확인해야 한다. 또다시 되돌아보고는, 막무가내로 SOS를 청했다. 천사 같은 미소와 함께,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나직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제를 설명해 주며, 분량은 30페이지라고 확인해 주었다. 

     

대학 정문에서

조금 전, 과제 내용 확인 설명해 줘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와  더불어 작별인사를 했다. 내 등 뒤에 대고 “나는 이자벨이야, 너는?” 통성명이 끝나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 “성탄때 부모님 집에 가는데, 나랑 함께 갈래? 다른 계획 있니?(Avez-vous d'autres porojets?) 없어.” 그런데 “네가 원한다면~?(Si vous-voulez-en…….?)”의 속뜻이 나에게는 모호하다. ‘정말로 오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인사 치례인지?’ 갑작스러운 초대에 어리벙벙해진 탓일까? 짧은 기간에 학습된 문장 뜻이 모래 위에서처럼 사라진 그 빈자라 위로, 오랜 세월에 체득된 말이 석판화처럼, 불현듯 떠올랐다. “니, 우리 집에 와서, 몇 밤 자고 가라, 꼬~옥!” 이렇듯 분명하게 말해주면 좀 좋으련만! 몇 분간이나 길에서 실랑이를 한 끝, 표현하는 어투의 문화적 차이를 수긍함으로써, 비로소 이자벨 부모 집에 가기로 합의했다. 잘못 이해로 인하여 일어나는 낭패를 피하기 위한 이런 절차는, 어느덧 소심한 이방인인 나의 생존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성탄 전야 만찬인저녁 식탁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했다. 아빠는 실업급여받는 중,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 여동생 아나이스는 초등학교 5학년, 이자벨까지 네 식구다. 

공통적인 적절한 대화거리가 궁핍한 상황에서는, 눈에 띄는 모습 우선순위로  대화가 전개되는 모습은 동서양 어디에서나 비슷한 가 보다. 이자벨과 사뭇 다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녹색 눈의 멋쟁이 엄마의 질문 공세다.  “입고 온  멋진 망토, 파리에서 샀니? 아니요. 그럼, 밀라노에서 구입했니? 아니요, 우리나라에서 입던 건데요. 뭣이라고? 정말이니? 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연달아 반복했다.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그 긴 망토는 앙드레김의 겨울 컬렉션의 한정 상품 베스트 1이었으니! 안감 진홍색과 겉감 블랙으로 압착된 이런 이중직을, 한국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은 도대체 믿기 어렵다고 했다. 질문 공세는 멈추지 않고, 진홍빛 100% 혼 실크 블라우스, 검은 모직 치마, 짙은 보라색 새틴 앵클부츠, 그리고 녹색 인조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핸드백까지. 보다 못한, 이자벨이 ‘그만!’하고 소리칠 때까지.

     

어쩌면당연한 질문일지도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는 공공기관에 비치된 이북에서 출간한 홍보책자 내용뿐. 루이 왕정시대와 같은 세습체제가 아직도 이 지구상에서 유지되는 이상야릇한 나라의 나머지 반 토막인, 다른 체재가 남한이라는 사실, 그녀가 아는 전부였다. 

속상한 맘으로 내가 툭 던진 ‘뿐만 아니라, 현대 자동차도 만드는 나라’라는 말에, 이자벨 아버지 반응이다. 그런 브랜드는 처음 듣지만, 일본의 ‘아윤다이’가 성능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단다. 내가 ‘아윤다이’는 한국브랜드인, ‘현대’라고 거듭 말할수록 그에게는 생뚱맞고도 불편한 흰소리로 들리는 것 같았다. ‘현대’라고 힘주어 발음하는 대신에 백지 위에 크게 ‘Hyundai'라고 썼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프랑스에서는 H가 발음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망각할 정도로, 작은 공동체의 통과 인터뷰로 긴장했던 밤이다.    

Si~(한다면~)가 나에게는 불편한 어법일지라도, 생존하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정보이지만, 그들은?


마침내 설거지 시간

성탄 전야의 긴 저녁 만찬이 끝나고.

설거지를 도우려고 일어서는 나를 향하여, 3인조 성인합창단처럼 큰 소리로 동시에 제지했다. ‘1년 동안, 설거지 담당은 꼬맹이라고? 그것도 1년이나? 다리 밑에서 주워왔나?’ 온갖 의문이 연달아 꼬리를 물었다. ‘콩쥐와 팥쥐’ 동화도 떠올랐다.

뿌루퉁한 얼굴로 힘겹게 많은 설거지를 끝낸 아나이스는, 엄마로부터 통과 사인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해방되었다. 서툰 손놀림으로 설거지하는 동안, 어른들은 축제에 맞갖은 달콤한 후식을 먹으며 유쾌하게 담소하는 시간, 나만 유독 불편함으로 부대꼈다. 이를 눈치챈 이자벨이 쳐다보지 말라는 신호로, 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취침 전에 들려준이자벨의 설명

아나이스는 학교성적이 부진해서, 5학년을 다시 한번, 더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이로 인해 재차 발생하는 학비는 부모님 대신 아나이스가 직접 갚아야 한단다. 비록, 그 비용을 다 책임질 수 없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 온갖 심부름을 1년 동안 해야 한다고 했다. 책임감 부여훈련으로. 


다음날정원에서  

앙제(Angers) 외곽에 소재한 중부의 전통주택에서 편안한 단잠을 잤다. 점심 후, 공원을 연상시키는 큰 정원을 산책할 때다. 어제와는 경계심이 다소 풀린 이자벨의 엄마가, 사뭇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용기를 낸 내가 “학교가 좀 심하지 않나요? 아이가 상처받을 건데요?”

그녀는 ”당연한 결과지. 상처 없는 인생은 없고. 어릴 때, 오히려 치유가 빨라. 모든 행동은 책임이 뒤따르지. 지금은 학교와 우리 모두를 미워하겠지만, 아나이스의 인생에 중요한 경험이야. 늦둥이라고 엄하지 못했던 우리 책임도 한몫했지. 바로 잡는 중이고, 하하하“ 

순순히 물러서지 않은 내가  ”동료 교사들에게, 창피하지 않으세요? “  

어깨를 약간 들썩 추켜세우며 양 손바닥을 위로 편 채로, 그녀가 ”물론, 자랑스러운 사건은 아니지. 다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일 뿐. 사회 공동규범에 부합하지 못한 아나이스의 책임 50%와 교육시스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게 양육한 우리 부모들 책임 50%지. 우리 늦둥이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성장해 가는 교육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성장통인 셈이지. 다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네요. “ 

베테랑 교사인 그녀의 논리 정연한 설명에 반박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관찰자의 마음

이런 내막을 몰랐던 나. 보이는 겉모습에 몰두한 나머지, 나 홀로 따뜻한  사람처럼 마음속으로 잔인하다는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어른들의 동맹에 잠시나마 가담한 후, 초등학교 5학년을 1 더 공부해야 하는 불만 가득한 아나이스의 눈길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했다. 그 애의 눈길 피했던 이유는 늦둥이로서 체득했던, 유년시절의 불안감을 공감하면서도 동질감의 의리를 저버린 비겁함에서였다.   

   

1박 2일 외출 끝난 뒤귀가하는 기차에서

혼자 피식 웃은 까닭은? 

초등학교 5학년 재수 통보받고 대처하는 프랑스 엄마 모습과 놀이방에서 5살짜리 딸이 일시적 퇴출당한 한국 아빠 모습,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꼬맹이의 퇴출 사유는 모든 장난감 혼자 독차지였다. 공동생활에 적합한 행동으로 개선된 후에 다시 이용할 수 있다는 첨부 요구 조건과 함께. 차별받았다고 큰 소리로 분노하던 그 옆에서, 동참하여 열심히 맞장구를 쳤던 내 모습도 뒤따라 떠올랐다.

비슷한 사건에서, 우리가  이렇게 사뭇 다르게 반응하는 이유는?

쾌속 TGV 넓은 창문으로 스치는 풍경 위로, 초등학교 5학년 재수생인 아나이스의 풀 죽은 얼굴이, 겹쳐 화면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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