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계절의 날씨를 극대화하는 묘사/10강 과제

by 글바트로스

누가 만드는 걸까?

누구의 손끝이 이렇게도 야무질까. 대지의 열기를 마구 빨아 삼키던 겨울, 밤마다 은밀하게 갖가지 씨앗들을 만들었나. 땅에 사는 식구들이 깊이 잠든 사이, 하늘 가족들이 팔 거둬 붙이고 동트기 전까지 밤새도록 씨앗을 뿌려댔나. 하늘에서 기척도 없이 내려온 씨앗은 땅에게 볼 비벼댄 자리마다 새싹이 돋아났다. 나뭇가지에 걸린 씨앗은 굳어진 피부를 찢으며 새순을 내보냈다. 밤새 생겨난 여린 움은 봄볕아래 갓난쟁이 이파리가 되었다. 제법 짙어진 연초록 잎은 저만의 색깔로 생명의 찬가를 그려댄다. 맑은 하늘은 흡족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것 같다.


지천이 봄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천지 사방이 봄이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온갖 풀잎이랑 갖가지 꽃이랑 새들도 -덩달아 꿩도- 내려왔다. 이런 봄이 되고 싶다, 나도!

아니, 봄 같은 사람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곁에 봄처럼 머물고 싶다. 뜨거운 여름처럼 너무 가깝지도, 싸늘한 겨울처럼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 따습은 봄만큼의 온도로 머물고 싶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고 언제나 자유로운 봄 아지랑이 같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아무에게도 집착하지 않고,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숨 쉴 구멍 넉넉히 남겨두고, 누구에게도 지겹지 않은 산뜻한 봄날이고 싶다.


봄빛에 풀향이 반짝대는 연녹색 풀밭이다.

좁쌀 만한 푸른 점들이 아침 햇살에 빛을 반사한다. 기이한 생각에 고개 숙여 바라본 그곳에는 저도 꽃이라고 한 번만 봐 달라고 푸른 얼굴로 웃는다. "그래 너도, 꽃이었구나!"

쌀 한 톨만큼이나 작고도 푸른 존재의 확대 화면에 드러난 모습은 야무진 꽃잎이었다. 그 작은 꽃이 나에게 말문을 터는 것 같았다.

"우린, 쌍둥이 자매야!"

짧은 말의 긴 울림통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 맞아, 우린 생명 공동체야! "

작은 존재들의 침묵, 그 잔잔한 메아리가 비로소 들리는 듯했다.

뜻대로 안 풀리는 일마다 골내며 나에게 삿대질하던 모습이 떠올라 민망했다. 발광체처럼 빛발 하지 못한다고는 수시로 구박했던 나에게, 처음으로 미안해졌다. 작은 들꽃은 이름 없이도, 불러주지 않아도 나처럼 툴툴거리지 않았다. 내 눈길을 끌어당기던 좁쌀 꽃의 푸른빛은 누구의 영혼일까?

말없이 묵묵히 살다 간 이름 없었던 목숨, 차마 발길 떨어지지 않아 되돌아온 작은 혼불일까?

사방천지가 야생화 꽃밭이다, 작은 이들의 귀향일까?


봄으로 태어나고 싶다.

온갖 풀이 앞 다투어 땅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생명력 넘치는, 봄이고 싶다. 땅 속 잔뿌리에 기댄 채로 드러누워 늦잠 자던 꽃들도 부산하게 깨어나 웃어대는, 그런 봄날이고 싶다.

“누구에게서 태어났니, 봄아?”

“몰라”

"어디에서 왔니?”

“...”

“네 이름은 알아?”

“아니. 이름이 중요해?”

누가 만들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도, 이름조차도 모른단다. 다 아는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인다.

하늘 장인에게, 한번 빌어볼까?

“다음 생에는요, 나도 봄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건 곤란해. 아주 작은 소망, 하나만 말해 봐.”

“ 샛노란 개나리요.”

샛노랗고 작은 개나리꽃으로, 네 마음 한 귀퉁이에 영원히 피어있고 싶다.


우연히 마주친 낯익은 얼굴, 그냥 흔한 날숨처럼 인사말을 건넸다.

“벌써, 강변에는 개나리가 샛노랗게 만개했어요!”

“아무 때나 피는, 멍청한 꽃이에요! 한 겨울에도 조금만 기온이 조금만 올라가면, 피거든요.”

공연히 인사한 것 같다. 개나리꽃도 가족도 일가친척도 아닌데도, ’멍청한 꽃‘이란 말에 언짢았다. 어쩌면 내 등 뒤에서도 “멍청한 여자예요”라고 말할 것 같았다.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아주 급한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잰걸음으로 피했다. 개나리가 말귀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가 언급한 말은 - '멍청한'은, - 파급효과가 대단했다. 아침 산책길 강변에 샛노랗게 피어있는 개나리를 볼 때마다, 귀가에서 그의 말소리가 들리듯 했다.

“개나리는, '멍청한' 꽃이에요!”


개나리꽃, 나에게는 눈에 밟히던 '한국 봄의 전령'이다!

르와르 강변에서 하늘거리던 붉은 꼬꼬리꼬꽃을 앞에서 '고향의 봄’을 응얼거릴 때마다, 선명하게 떠올라 귀향하라고 손짓해 대던 꽃도 샛노란 개나리였다. 고향 돌담길에 핀 병아리꽃 마주 보며 보며, 샛노랗게 웃고 싶었던 날들이었다.

키 작은 가지마다 잎이 채 나오기도 전에 미리 피는 성급한 모양새도, 민망할 정도로 앙증스럽다. 끝내 참아내지 못하고 결국 쏟아내는 내 모습 같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절반은 나를 닮아서, 좋아하는 것일까?

성급하게 송두리째 활짝 피고는, 겸연쩍어하는 모양새다. 만개한 꽃잎은 하늘을 쳐다보는 대신,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거나 옆 동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개나리꽃의 샛노란색은 언제나 갓난쟁이 웃음처럼 순결한 빛깔로 다가온다.

개나리, 수줍게 고개를 옆으로 꼬며 끝내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던 유년의 얼굴이다.

내 심혼에 영원히 지지 않는 '샛노란 동심의 꽃',

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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