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었는데, 한동안 아니 한참 동안이나 쓰지 못했다. 어쩌다가 써 놓은 몇 줄은 가식 덩어리라 가증스러운 기분조차 들었다. 어둡고 칙칙하기만 한 회색일 때가 많았는데, 글은 최대한 노란색인 척 애쓰고 있었다.
어쩌면 수. 년. 간 나는 나를 못 견뎌했는지 모른다. 12살 때, 2살 터울의 언니가 갑자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엄마의 신경이 온통 언니에게로 향하자 관심을 받기 위해 그랬던 건지 부모님의 지갑에 한동안 손을 댔었다.
- 그것이 관심받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원인이라면 그랬다. - 막내로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밝고 씩씩했던 노란색 빛의 아이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어떤 잘못을 해도 거의 혼난 적 없던 아이는 집안에서 냉대를 받는 이방인이 되었고, 스스로에게도 주홍글씨를 새겨 넣었다. 그렇게 주저앉고, 외톨이가 되는 시간들을 만들어 갔다.
장대비가 내리는 여름밤 그 비를 온전히 맞고 다녀도 '나'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는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학교에서 입을 거의 닫고 살다시피 했다. 영혼 없이 끌려다니던 등굣길 버스 안에서 어느 날은 대자로 넘어지기도 했다. 다리 힘이 약한 건지 마음이 부러진 건지 그랬다. 성인이 돼서는 직장을 옮겨 다니기 일쑤. 그즈음 혼자 내린 진단은 만성 우울증이었다.
와중에 정말 좋은 피자가게 사장님과 일하게 되었다. 영업직원이셨다가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피자를 만드는 나도 그렇고 배달 아르바이트생들도 그렇고 - 보통은 무시들 많이 하는데 - 언제나 진심으로 대해주셨다. 그래선지 나중에 들은 소식에 함께 일했던 아이들이 군대 휴가 나와서도, 심지어 결혼해서도 계속 직원으로 일하고 지금까지도 관계가 돈독하다고 했다. 그런 직장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직장에 나가는 것이 재밌고, 즐겁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2년이 다 되어 갈 때쯤 갑자기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고, 우울감이 짙어졌다. 처음 그만둔다고 했을 때 사장님은 손편지까지 써주면서 잡으셨지만 얼마 견디지 못하고, 무단결근까지 하게 되면서 죄송한 마음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오던 날이었던가. 맘에 안 드는 나를 줄에 메달아 질질 끌고 다녔던, 그 길고 길었던 시절을 어쩌면 그만 두기로 했는지 모른다. 죽는다는 것은 그 줄을 싹둑 잘라내는 일이 아닐까?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더운 여름날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지하철을 탔다. 어떤 마음에서인지 한정거장 일찍 내려 갑자기 걷고 싶어졌다. 4호선 반월역. 배가 고파 가게에 들러 빵을 샀던가? 나오면서 상록수역 쪽으로 가는 방향을 물었다. 아주머니는 갈려면 한참 가야 되는데 이 더운 날씨에 왜 그런 수고를 하려는 건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무엇을 샀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무언가를 손에 들고 짧은 도보여행을 시작하려 도로 쪽으로 나왔다. 사방은 의. 외.로 산속이었다. 대낮에 마치 작은 정글로 들어선 것만 같은 그런. 그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혼자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뒤를 돌아보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애들 세명이 내 뒤를 따라 조용히 걷고 있는 것이아닌가. 인도가 따로 없다 보니, 일렬종대로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형상이었다. 내가 아무리 우울하고, 심신이 초췌해 있어도 이건 지속 가능한 도보여행이 아니었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봤다. 갑작스럽게 멈추자 내 바로 뒤의 아이가 놀라서 잠깐 주춤했다. 순간, 나는 아이의 눈빛에서 사냥감을 놓친 실망스러움 같은 것을 보았다.
"몇 시인가 궁금해서 시간 좀 물어보려고..." 아이는 얼버무렸다.
길을 건너 역을 향해 왔던 길을 다시 가는데 갑자기 여름임을 잊은 듯한 오한이 느껴졌다. 역에 다 왔을 때쯤, 구조요청이 필요 없을 만큼의 수많은 인파를 예상했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걷고자 노력했지만, 심장은 아까부터 벌렁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야! 너 거기 서봐" 아까 사냥감을 놓친 아이였다. 낡은 슬리퍼를 질질 끌어 내 앞에 서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칵, 퉤! 너 몇 살이냐?" 나는 얼어버린 입으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스물...... 네 살이다..."
아이가 비아냥대면서 뭐라 몇 마디 했지만, 기억에 없다. 아마 그 아이가 돌아서고 나서야 - 예의 바르게 - 나는 돌아섰을 것이다. 그리고는 텅 빈 플랫폼에 들어서서 차디찬 시멘트 의자에 앉았던가?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다 종류를 알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수치심이 굵디 굵은 장대비가 되어 나에게 쏟아지는 듯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