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는 이미 준비물이 실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얹혀살고 있는 언니네 가족들은 여름휴가를 떠나 있어서 텅 빈 집, 모든 것이 적당한 그런 상황이었다. 노트 한 장을 찢어 영혼 없는 몇 줄의 유서를 썼다. 문구가 지나치게 상투적이라 그런지 놀랍게도 별 감정이 일지 않았다. 준비된 것은 40알의 수면제. 우울한 몰골과 눈빛으로 동네의 약국을 시간 날 때마다 방문해 긁어모은 것이었다.
세 곳은 별말 없이 건넸는데, 마지막 약국에서는 남자 약사가 내 모습을 잠시 보더니
"무슨 용도예요?"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나는 불순한 생각을 들켜버린 것만 같아 잠시 당황했다.
"잠이 잘 안 와서....."
"남용하면 안 되는 거 알죠?"
40알을 먹고 죽을 수 있을까?
순간, 죽음이란 것이 수학 문제 풀기보다 쉽게 여겨졌다. 이렇게나 간단할 수가.....
나는 작은 거실에 등을 기대고 앉아 두 개씩, 때론 서너 개씩 그것들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을 것이다. 이제 죽음이라는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잠에 빠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지나치게 맑아지고, 불안감만 상승하면서 심장이 빠르게, 아니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덤덤하기까지 했던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이미 늦어버렸다. 속이 심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을 격하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듯 힘겹게 모두 쏟아냈다. 그렇게 구토물과 뒤엉켜 기운 없이 널브러진 상태로 얼마간 일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뒤집혔던 속이 진정되고, 심장도 안정을 찾았는지 원래의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은 그저 혼자만의 난리통이었을 뿐 하루는 어김없이 - 고요하게 - 저물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여름의 빨간 노을이 창가에 닿아 내 시선을 한동안 붙들었다.
죽지 못한 삶은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삶으로 다시 이어졌다. 사회생활도 여전히 부적응, 카드빚만 불어나 그 빚을 갚기 위해 20대 후반에 언니네 집에 또다시 얹혀살게 되었으니 - 결혼이란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가족을 거두어 주는 일이 보통일이 아님을 뒤늦게 알게 됐다 - 괜찮아 뵈는 삶 하고는 이제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렇게 5년여 공장을 다녀 빚을 겨우 정리하고는 30대가 돼서는 권리인지 의무인지 알 수 없는 결혼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핑크빛 환상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신혼초부터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늘 곁에 두고 살았으니까.
결혼이란 것을 내 인생의 구원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리석게도. 살얼음만 같았던 부부 사이, 시간이 지나 결혼 전처럼 카드빚이 쌓여버린 일이 다시 터지고 말았다. 남편이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더욱더 비정상적인 수직관계로 치달았다. 나는 숨 죽이며 며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친정에 전화를 했는데 늙으신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다. 잘 지내냐는 물음, 그러다 카드에 관한 이야기를 무심코 해버렸다. 이미 엄마에게 얘기해 놔서, 당신도 아시리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전혀 몰랐다며 크게 걱정하셨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복잡하다니...... 밥은 잘 챙겨 먹냐?"
나는 수화기를 놓치고, 크게 울었다. 아니 통곡을 했다. 부모님께 실망을 안겨줘 그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12살의 내가 - 마음속에 새겼던 주홍글씨를 새기고 꽁꽁 숨어버렸던 아이가 - 어느덧 함께 울고 있었다. 아버지의 따뜻한 음성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를 조금씩 녹아내리게 하고 있었다.
이후로 3년쯤 후던가. 여름날, 다리를 다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진 장애인이었던 둘째 언니가 죽었다. 그 해 겨울에는 아버지가 다시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셨다. - 내 편치 않은 결혼생활이 아버지의 수명을 행여나 단축시킨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 며칠 지나고 나는 삼 일간에 걸쳐 저승사자를 꿈에서 두 번이나 보게 된다. 고등학생 시절, 아버지가 경운기 사고가 크게 나시기 이틀 전 집안에 대들보가 죄다 무너지는 예지몽을 꾼 적이 있어 찜찜해 있던 터였다. 문병 온 형부와 가족들에게 말을 꺼냈더니 꿈은 반대라고 애써 웃으며 위로했다. 하지만 삼일 정도 지났던가. 언니들과 돌아가며 아버지 간병을 위해 병원에서 잠을 자던 때였는데, 그날은 내가 교대하는 날이었다. 병원에 있던 큰언니한테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목소리가 이상했다.
"오빠한테 전화 왔는데, ** 가 자살했대......"
나는 갑자기 숨이 턱 막혀버리는 것만 같았다. 결혼해서 아이도 있고, 힘들게 합격해서 몇 해 전 학교 선생님이 되어 오빠의 자랑거리였던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자주 만났던 조카아이, 둘째여서 그런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담아두는 것 같은 아이였다. 어른이 되고 선생님이 된 뒤로는 좀 더 새침해 보여 멀어진 느낌이었는데 어떤 일이 있어 우울증이 심하게 왔었다고 한다. 나 같이 잘난것도 없이 방황만 하며 지내 온 사람도 이렇게 살아있는데 잘 지내는 줄만 알았던 그 애의 죽음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 별것 아닌 일에 세상은 지나치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도로에 여기저기 세워진 < 바르게 살자 >라는 점잔 빼는 그놈의 비석을 통째로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에 아버지도 결국 돌아가셨다. 불길했던 꿈은 다시 예지몽이었던 것이다. 반년 사이에 가족들은 어느덧 세 번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