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소개서 3

깨어나다.

by 이녹

그다음 해 추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동네 작은 가게에서 꼼짝 않는 자세로 눈썹 문신을 받고 나온 초저녁 겨울, 약국에 들를 일이 갑자기 생각나서 교차로의 신호등 앞에 서 있있다. 춥다기보다 한참을 꼼짝 못 했던 몸뚱이가 일순간 해동되는 기분이 들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횡단보도 맞은편에 서 있었다. 내 옆에 남자애 둘이 그 아이를 향해 소리 질러 아는 척하는데 맞은편에 아이는 그 아이들이 반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신호가 바뀌어 건너는데 도로 한복판에서 만난 아이들이 그 아이의 어깨와 책가방을 갑자기 휘어잡더니 왔던 길로 다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약국 구석 모퉁이, 빈 박스가 잔뜩 쌓여있던 곳에 있는 힘껏 패대기를 치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너무 신이 났는지 깔깔 웃어대며 도망을 쳤는데 그 불쾌한 웃음이 찬바람을 타고 온 세상의 배경음악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온몸이 느닷없이 박스더미에 쑤셔 박힌 아이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지나는 사람들은 잠깐씩 시선을 주다가 죄다 갈길들 가는데, 나만은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속 깊은 곳에서는 울화가 치밀고 있었다. 겨우 일어난 아이는 그 아이들을 뒤쫓아 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나도 곧바로 그 아이를 따라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세상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분노 때문인지, 달음박질 때문인지 모를 심장은 이미 요동치고 있었다.

오르막길 건너편에서 아이들 무리를 발견한 나는 빨간색 신호등 앞에 서서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오래전에 돈 떼먹고 도망갔던 인간을 딱 마주치기라도 한 듯 처절하게.

"너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목소리가 떨렸다. 때마침 바뀐 초록색 신호에 길을 건너면서 나는 분노가 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까 처박혔던 노랑머리 아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 애들과 서서 종이컵에 든 떡볶이를 맛나게 먹고 있었다.

이쯤 되면 패대기를 당한 것은 내쪽이었다.

"너네 그런 게 학교폭력이야! 어떻게 그런 장난을 하니?"

예상과 다른 상황에 무슨 말을 했는지 점점 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횡설수설을 하고 있었다. 내동댕이 친 아이는 키 크고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한 아니 방금 끝내고 온 시커먼 눈썹을 한 아줌마의 출연을 재밌어하는 거 같기도 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여자애가 한마디 했다.

"너네 한소리 들을 줄 알았다. "

한번 튀어나온 분노는 집으로 오는 길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이 가라앉자, 내가 한 행동이 낯설게만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날의 나를 이해하게 됐다. 그 추운 겨울 저녁에 왜 그렇게 미친 듯 뛰어가 소리를 질러댔는지...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두 친구는 여행 중 들어갔던 술집에서 불행한 순간을 맞닥뜨리고 만다. 술집에서 친근하게 접근했던 한 남자에게 델마가 어두운 주차장에서 성폭행을 당하려는 순간, 다행히도 루이스가 총을 가지고 친구를 구하러 왔다. 그렇게 남자를 위협하면서 마무리되나 싶었으나 남자의 뻔뻔한 멘트에 분노에 휩싸여 버린 루이스는 결국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탕! 탕! 탕!

살인을 저지르고만 둘은 설레어 있던 여행자에서 순식간에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만다. 상황이 이 지경으로 치닫게 된 원인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면서 말다툼이 생기는데 협박만 해도 될 것을 죽였다고 델마는 친구를 원망하면서 운다. 뒤따르는 친구의 추궁에 루이스가 불편한 마음으로 인정한다. 과거에 성폭행당했던 자신의 불행을... 그 숨겨져 있던 분노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나는 그 초저녁, 박스에 쳐 박힌 아이에게서 나를 봤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일로 부모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온갖 쌍욕마저 가끔 듣고 지내던 때, 자기 누나가 와 있는데 인사도 안 하고 온다고 어린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에 패대기를 쳤었다.

폭력의 시작이었다.

내겐 총이 없었으니, 수년이 지나도 사라질 리 없던 억울함과 분노가 그렇게 달음박질치게 만들고 소리를 지르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나고 보니 그랬다.


그리고 그 달음박질은 시간이 지나 또 다른 시작의 서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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