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한 이야기
나는 원래 손을 먼저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회의실에서 의견을 먼저 말해본 기억이 거의 없고, 뭔가를 하겠다고 자원해 본 적도 드물었다.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편했다. 그것이 나의 기본값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경기도인재개발원에서, 서울시인재개발원에서, 경희대학교 테크노경영대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받았다. 전국 421명이 경쟁한 과정에서 1등을 했다. 사무관으로 승진했고,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책도 냈다.
이 문장들을 나열하면서도 가끔 낯설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20년, 나는 10개월짜리 장기교육 과정에 선발됐다. 몇 년을 준비한 결과였다. 수많은 경쟁자를 뚫고 얻어낸 자리였다.
그런데 막상 교육장에 들어가는 날, 기대보다 먼저 다른 감정이 왔다.
그해는 코로나19가 전국을 덮친 해였다. 내 동료들은 방호복을 입고 선별진료소에 서 있었다. 민원 전화가 폭주하는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다. 어떤 동료는 가족과 격리된 채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교육장에 앉아 강의를 듣고 있었다.
편하게 공부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더 집중하자."
일선에서 싸우는 동료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하려면,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지금 내 삶에 충실히 하는 것.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0개월이 시작됐다.
그 10개월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교육이 불가능했다. 강의는 전부 줌(Zoom)으로 진행됐다. 10개월 동안 나는 책상 위 노트북 화면으로 강사님과 소통했다. 옆자리 동료와 밥도 제대로 못 먹던 시절이었다.
그 노트북 화면 앞에서, 결심을 하나 했다.
'이 강의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자.'
처음에는 에버노트에 강의 내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록하면서 욕심이 생겼다. 10개월 과정이 끝나면, 모든 강의 자료를 기록한 것을 하나 가져가자. 그것이 나의 신념이 됐다. 매일같이 기록했다.
그러다 씽크와이즈라는 마인드맵 프로그램을 유튜브로 독학해서 기록의 도구를 바꿨다.
기존에 에버노트나 메모장에 기록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록했다는 것에 만족했지만, 그것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씽크와이즈는 달랐다. 밖에 있는 것들을 집어넣고 내재화시킨 다음, 내재화된 것들을 다시 밖으로 끄집어내는 능력. 구조와 시각화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강의 내용을 정리해서 동료들에게 공유하기 시작하자 피드백이 돌아왔다.
"이런 노트 정리는 처음 봤다."
그 말 한마디가 나를 움직였다. 자존감이 높아졌고, 더 잘하고 싶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골프를 잘 치려면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이 조금 불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자세로 매일 연습하면, 나쁜 습관만 굳어진다. 성실함에는 두 가지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는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한 치열한 고민.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방향이 결정됐을 때, 미련하리만큼 꾸준히 행동하는 것.
방향 없는 꾸준함은 그냥 바쁜 것이다. 꾸준함 없는 방향은 그냥 생각이다.
나에게 그 올바른 방향은 기본이었다. 기록하는 것. 정리하는 것. 공유하는 것. 화려한 전략이 아니라, 매일의 기초를 성실하게 쌓는 것. 그 기본 위에서만, 깊은 고민이 가능해지고, 긴 호흡의 생각이 가능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노주선 박사님의 강의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교육이 끝난 후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변해 있을 것 같습니까? 10년 후, 당신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그 질문이 마음속 깊이 박혔다.
1년에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던 내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은 내용을 씽크와이즈로 정리하고, 또 공유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변화는 한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통장에 잔고가 쌓이듯, 매일매일 일상의 작은 기본들이 모여서 큰 변화가 이뤄지는 것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작아서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쌓이고 있었다.
그렇게 10개월이 지났다.
교육을 마치는 날, 나는 장원급제 최우수 졸업자로 선정됐다.
정체기 속에서 무기력하기만 했던 내가, 낯선 환경 안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교육이 끝나고 현장으로 돌아왔다.
달라진 사람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교육에서 배운 것들을 현장에 하나하나 적용했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일을 개선하려 했다.
열심히 했다. 아주 열심히 했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말들이 들려왔다.
"저 사람, 딴 데 가려고 저러는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하겠다. 그때 정말 힘들었다.
노력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 에너지를 채워주는 것은 결국 주변의 인정이다. 그 인정이 없을 때, 사람은 조용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나도 그 유혹을 느꼈다.
그냥 평범하게 하면 되지 않나. 왜 나만 이렇게 하고 있지. 이게 맞는 건가.
그때 나는 그냥 나 자신에게만 물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에 만족하는가?"
이 질문이 내 닻이 됐다. 조직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계속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계속했다.
통장 잔고가 쌓이듯,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쌓았다.
그러자 점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행정안전부 지방규제혁신 성과평가에서 2022년, 2023년 2년 연속 우수지자체로 선정됐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썼다.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매일 강의노트를 정리하고, 논문 구조를 시각화하는 과정이 쌓였다. 석사학위 최우수 논문상을 받고 학술지에 등재됐다.
2024년 행정안전부 제42회 지자체 HRD 콘테스트, 전국 10개 기관 12개 팀의 경쟁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전국 421명이 경쟁한 5급 승진리더과정에서, 나는 1등을 했다.
그날 상을 받으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그때 그만두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그 시간들이, 전부 이 자리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장기교육이 끝나고 이듬해인 2021년 3월. 경기도인재개발원에서 연락이 왔다. 6급 핵심리더과정 후배 교육생 120명 앞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두려웠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내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이전의 나였다면 아마 안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결심한 것이 있었다. 낯선 환경에 나를 집어던지는 사람이 되겠다고. 주저 없이 "네,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새벽까지 밤새워 준비했다. 강의가 시작됐고, 용기를 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120명 앞에서. 1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강의가 끝나자,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중 지금도 기억나는 메시지가 있다.
"생활 속의 기록이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치열한 자기 관리가 생생히 녹아있는 강의, 감탄하면서 들었습니다."
나는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았던 그 새벽들이, 누군가의 삶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시작이었다.
2021년 씽크와이즈 유저 콘퍼런스 발표. 2023년 경희대학교 테크노경영대학원 강의. 곡성군수님 앞에서 강의. 경기도인재개발원, 서울시인재개발원. 행정안전부 지방자치인재개발원 나라배움터 콘텐츠 제작. 한국지방자치학회 토론자.
낯선 곳에 나를 한 번 던졌더니, 그 던짐이 5년째 계속되고 있다.
2024년 6월, 카톡이 한 통 왔다.
다른 부처에서 근무하는 동료였다. 복직을 앞두고 강릉에 갔다가, 박이추 선생님의 카페를 방문했다고 했다.
박이추 선생님. 강릉 커피거리를 만든 우리나라 1세대 바리스타다. 이분은 커피를 내리는 순간에는 숨도 쉬지 않을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 그렇게 30년 넘는 세월을 커피 한 잔에 온 마음을 다했다.
그 동료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팀장님은 공직 생활을 하면서, 온 마음을 다한 순간이 언제였습니까?"
나는 그 질문을 받고 한참 생각했다.
뚜렷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이런 느낌이 들었다.
매일매일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줌 화면 앞에서 혼자 새벽까지 기록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에게 물으며 계속했다. 그 하루하루가 통장 잔고처럼 쌓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 하루하루가 쌓였다.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위한 길이 어딘가 있어서 내가 그 길을 걷는 게 아니라, 걸어가다 보면 그 길이 나의 길이 되는 것이다."
행동이 먼저다. 뇌가 그에 맞춰 변화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실패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김호 작가는 세상이 배우려는 자와 배우지 않으려는 자로 나뉜다고 했다. 나는 거기에 한 줄을 더하고 싶다.
배운 것을 적용하는 사람과, 배운 것을 적용하지 않으려는 사람으로 나뉜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행이란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이다. 단, 돌아왔을 때는 변화된 나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여행이다."
지금 당신이 있는 그 자리가, 그 여행의 한가운데일 수 있다.
낯선 환경에 자신을 던져보라. 올바른 방향을 찾고, 그 방향을 향해 미련하리만큼 꾸준히 가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순간이 와도, 오직 자신에게만 물어라.
"나는 내가 하는 이 일에 만족하는가?"
그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계속하라.
그 계속함이, 반드시 선이 된다.
몇 년이 흘렀을 때, 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당신은 공직 생활을 하면서, 온 마음을 다한 순간이 있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부터 하루하루 쌓아가길 바란다.
https://youtu.be/A88Wd2r85is?si=oJVgWQHBJ5XZNiF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