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아날로그가 차가운 스마트로 변하기까지 3
따뜻한 아날로그가 차가운 스마트로 변하기까지
첫 출근 날, 나는 정장을 차려입고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설렘 반 긴장 반으로 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이미 선배들이 앉아 있었다.
시계를 보니 8시 30분. 출근시간은 9시였는데?
"아, 신입이구나. 여기 앉아."
김대리가 가리킨 자리는 문 옆 구석진 곳이었다.
에어컨 바람도 안 오고, 복사기 소음도 가장 큰 자리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게 내가 회사에서 한 첫 마디였다.
'감사합니다.' 왜 감사한지도 모르면서.
첫날 점심시간, 선배들과 함께 식당에 갔다.
나는 자연스럽게 빈 자리에 앉으려다가 멈췄다.
아무도 앉지 않고 서 있었다.
"과장님이 오시면 앉는 거야."
5분 후 과장님이 오셔서 자리에 앉으시자, 그제야 모두가 앉았다.
나는 그때부터 회사의 암묵적인 규칙들을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막내가 버튼을 눌러야 한다.
회의실에서는 막내가 물을 준비해야 한다.
회식이 있으면 막내가 가장 늦게 집에 간다.
복사기가 고장 나면 막내가 고쳐야 한다.
누가 가르쳐준 건 아니었다.
그냥 모두가 알고 있는 불문율이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과장님이 급한 자료를 요청하셨는데, 내가 알고 있는 방식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었다.
엑셀 함수를 쓰면 10분이면 끝날 일을 수작업으로 2시간 걸려서 하고 있었다.
"과장님, 혹시 이 부분은 함수를 사용하면 더 빨리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과장님이 나를 쳐다봤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신입이 벌써 요령을 부리려고 하네? 기본부터 차근차근 배워야지."
그 순간 깨달았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제안하는 건 '요령 부리기'였구나.
그 후로는 입을 다물었다.
비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보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도 조용히 있었다. 대신 속으로만 생각했다.
'왜 이렇게 하지?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하지만 입 밖으로는 "네, 알겠습니다"만 나왔다.
회의 시간에는 더했다. 나는 듣기만 해야 했다.
말하는 건 과장 이상이었다. 대리급은 간혹 의견을 물어보면 조심스럽게 답했고, 주임급은 고개만 끄덕였다. 신입인 나는 존재감을 지워야 했다.
어느 날 회의에서 명백한 오류가 있었다.
데이터 계산이 틀렸는데, 모두가 그걸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신입이 끼어들면 안 돼.'
결국 그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내가 지적하려던 그 오류 때문에. 그때 정말 답답했다.
'내가 말했으면 달라졌을 텐데...'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말을 아끼게 됐다.
상사가 잘못된 지시를 내려도 "네"라고 답했다.
비합리적인 요구를 받아도 "네"라고 답했다.
주말 출근을 시켜도 "네"라고 답했다.
왜? 그게 안전했으니까.
말을 하면 찍힐 수도 있고, 조용히 있으면 무사했다.
튀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동기들과 술자리에서는 달랐다.
"아, 진짜 답답해. 저 꼰대들 때문에 회사가 발전을 못 해."
"맞아. 우리 과장은 아직도 손으로 계산해. 컴퓨터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러게. 근데 뭐 어쩌겠어. 참고 살아야지."
우리는 속내를 털어놨지만, 결론은 항상 같았다. '참고 살자.'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어느새 나도 신입사원을 관리하는 위치가 됐다.
후배들에게는 내가 당했던 것처럼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신입 후배가 제안을 하면, 나도 모르게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듣기 싫었던 말을 나도 하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후배가 먼저 가려고 하면 "야,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라고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행동을 후배가 하려고 하니까 막고 있었다.
그게 내가 배운 회사 생활이었다.
참는 법, 눈치 보는 법, 튀지 않는 법, 상사 비위 맞추는 법.
정작 일하는 법은 나중에 혼자서 터득해야 했다.
5년 차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일'을 배운 게 아니라 '조직 내 생존법'을 배웠구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침묵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혹시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하며 스스로를 의심했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도 "아직 내가 말할 때가 아니야" 하며 미뤘다.
그러다 요즘 새로 들어온 후배를 만났다.
"선배, 이 프로세스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개선해도 될까요?"
"이 회의 정말 필요한가요?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이런 식으로 하면 업무 시간을 30%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친구는 입사 첫 달부터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처음엔 '버릇없다'고 생각했다.
'신입 주제에 벌써 개선안을?'
하지만 점점 부러워졌다.
나는 왜 저런 말들을 못 했을까?
나는 왜 5년 동안 좋은 아이디어를 속으로만 삼키고 살았을까?
회사에서 가장 먼저 배운 건 일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그 침묵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줬지만, 동시에 나를 작게 만들었다.
지금 나는 그 침묵을 깨고 싶다.
하지만 쉽지 않다. 5년 동안 굳어진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노력하고 있다. 오늘도 회의에서 손을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생각에는 이런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작은 변화지만,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