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뒤돌아 보면 이 이유들 때문에, 싸우지 않고 행복했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1. 자주 안봄
우선 우리는 가까이서 산 적이 많이 없었다. 가장 가까이 살 때가 서울의 끝과 끝에서 살 때다. 내가 강동에서 살고 있었고, 남친은 보라매 쪽에서 살고 있었다. 서로 집돌이 집순이인 것을 감안하면, 퇴근하고 평일에 안보는 것이 서로의 성향상 맞았고, 주말마다 보는 것이 속이 편헀다. 연애 중에 평일에 만났던 기억이 많이 없지만, 그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주에 4-5번씩 만난다고 하는 커플들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서로만 괜찮다면, 일주일에 한 번도 충분한 것 같다. 자주 보지 못해서, 싸울 가능성도 낮아진 것은 맞는 거 같다. 자주 안 본다고 걸리는 게 있는데 무조건 참는 것도 문제지만, 자주 안 봐서 가끔 보니 더 좋은 것도 있었다.
2. 둔한 성격
여자들은 그 미세한 감정선까지 잘 캐치해 내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상 안 좋은 의도로 약간의 냉소주의적 발언을 해도, 나는 무던히 넘겨버린다. 그게 그렇게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일 거라는 의심을 애초에 안 한다. 그냥 내 뇌가 그렇다. 얼마 전에 남자친구가 '이렇게 그릇이 쌓여있어서, 컵을 깨뜨렸다'라고 했는데, 그 말속에 내가 지난밤 설거지를 하고 그릇을 너무 막 쌓아놓아서 그렇다는 의도를 비꽈서 했을 줄이야 상상이나 못 했다. 남자 친구가 그렇게 솔직하게 고백을 하기 전까지 말이다. 둔한 성격이 남들을 답답하게 할 수는 있어도 내 정신건강에는 확실히 좋은 것 같다. 지난 7년간 내가 모르게 넘어간 이런 순간들도 아마 있었을 수도 있다. 내장점이자 단점인 성격이다.
3. 남자 친구의 기본 마인드
남자 친구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싸우게 된다면, 그건 무조건 내 잘못이야'. 왜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으나, 남자친구가 나를 보면서 나는 큰 그릇이나, 자기는 간장종지임을 자각한 점이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무언가 삐그덕거리거나, 싸한 분위기가 약간이라도 감지되면, 남친이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자기 스스로한테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이건 비단 남친 뿐만 아니라 나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 탓만 하면 더 이상 좋아질 수가 없다.
4. 같은 MBTI
MBTI가 유행하기 전부터 만났는데, 나와 남친은 같은 ISTJ이다. 생각이나 기분을 자주 공유하다 보니 닮아진 건지, 원래부터 닮아있었던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본 사고방식이 비슷하다는 건 정말 신기하다. 얼마 전에 드라마를 보다가, 강물에 물건을 떠나보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고 서로 '환경오염한다'라고 생각했다. 참, 어이가 없지만, 다양한 면에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가끔 똑같은 말은 내뱉기도 한다.
5. 기대가 없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조금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 같다. 남자 친구는 항상 서로에게 기대가 없어야 행복하다고 했다. 연인으로서의 기대, 남편으로서의 기대, 신혼으로서의 기대나 로망은 최대한 없으려고 한다. 그래야 작은 것에도 더 행복하고 고마워지는 일이 많은 것 같다. 많이 기대하고 있다가 그것에 못 미치면 괜히 혼자만 실망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