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12세
5살 때, 2살이었던 동생이 너무 예뻐서 우리를 돌봐주던 할머니 몰래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피아노 학원에 가서 자랑하고 싶었다. 할머니가 눈치채고 뒤쫓아오셨고, 나는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동생은 아장아장 걷는 시절이라 곧 엎어져 울기 시작했고, 할머니가 다가오시자 나는 급히 동생을 일으켜 헐레벌떡 학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결국 도착 직전에 따라오신 할머니에게 동생을 빼앗겼다.
유치원에 처음 갔을 때는 매일 간식이 너무 맛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생이 집에 있는데 나만 먹는 게 미안해서 간식을 먹지 않고 챙겨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기특하게 여기셨는지 선생님은 종종 간식을 두 개씩 챙겨주셨다.
지금도 동생은 여전히 예쁘지만, 그때도 나는 동생이 너무 예뻤다.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땀 뻘뻘 흘리며 밀어주기만 해도 동생이 좋아하면 행복했다. 여름이면 파란 김장 대야 두 개에 물을 받아 베란다에서 노는 게 피서처럼 좋았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단순한 행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몇 년간 일하러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를 낮잠 재워놓고 일을 나가셨다. 혹시 우리가 깨면 울까 봐 간식을 잔뜩 준비해 두셨고, 머리맡에는 좋아하던 비디오테이프가 놓여 있었다. 어느 날 엄마 말로는, 퇴근길에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 '누구네 애들인가' 했는데 집 가까이 갈수록 점점 커져서 올려다보니, 우리 남매가 베란다 방충망에 코를 박고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일을 계기로 엄마는 일을 그만두셨다.
물론 예뻐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간지럼이 많던 동생을 이불속에 넣고 토할 때까지 간지럽혔고, 겁 많은 동생에게 현관문이 잠겼는지 확인하라고 보내거나, 그림자를 가리키며 “도둑 아저씨 온다!”라고 겁주며 울린 적도 있다. 동네 아이들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다가 동생 앞니가 나가기도 했는데, 생니를 뽑느라 어른 다섯이 달려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유치원 소풍에서 누에고치를 처음 만졌는데, 부드럽지만 꿈틀거리는 촉감이 징그러워 경악했던 기억도 있다.
7살 여름방학, 사촌 언니가 이모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들고나가 온종일 이것저것 사고 다니며 정말 멋진 하루를 보내게 해 줬다. 불량식품을 사 먹고, 종이 인형을 사고, 방방이를 탄 것이 전부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웠다. 그걸 보고 배운 나는 어느 날 엄마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슈퍼에서 이것저것 사고, 잔돈이 너무 많이 남아 경비 아저씨에게 “엄마가 갖다 주래요!”라고 주고 도망쳤다. 엄마가 운동화를 사준다는 말에 모든 걸 잊고 나섰다가 경비 아저씨를 다시 마주쳤고,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에게 끌려 집으로 돌아가 신나게 맴매를 맞았다.
놀이터에서 안 놀고 동네 아이들과 이 놀이터 저 놀이터를 옮겨 다니며 놀다가, 신나게 놀고 돌아온 날.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혼내려다 엉엉 울었다. 그 시절은 개구리소년, 박초롱초롱빛나리 사건처럼 어린아이들이 위험하던 시절이었다.
7살 때 놀이터에서 만난 친구가 초등학교에서 같은 반이 되어 기뻐했는데, 그 해 동생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다 큰 사람도 동생을 얻을 수 있구나' 했는데, 1년 뒤 외국에 다녀오니 그 동생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생애 첫 죽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기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동생 유치원 소풍을 따라 1박 2일 여정에 동행한 적이 있다. 동생을 따라온 다른 언니와 샤워하던 중 동생이 그새를 못 참고 실수를 했다. 그 똥 묻은 팬티를 선생님은 나에게 씻기라고 시켰다. 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그 선생님의 이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ㅊㅅㅎ 선생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주말이면 엄마, 동생과 함께 시립도서관에 놀러 갔다.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게 별미였다. 책은 세 권까지 빌릴 수 있었고, 그중 두 권은 엄마가, 한 권은 내가 골랐다. 그때 빌려 보았던 책 중에 『모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문구점에 선물 사러 갔는데, 엄마가 색연필 세트를 사주자 나도 갖고 싶다고 울고불고 떼를 썼다. 결국 똑같은 걸 얻어냈던, 어쨌든 해피엔딩이었던 기억.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아빠는 해외 출장이 잦았고 큰아빠가 자주 집에 들르셨다. 말 안 듣는다고 혼을 내시곤 했는데, 그 이후로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꿈에서 큰아빠가 수박껍질의 빨간 부분까지 먹으라고 해서 억지로 먹다 서럽게 울며 깬 적도 있었다. 지금도 나는 그 큰아빠와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
선생님 심부름으로 다른 반에 갔다 돌아오던 중,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계단에서 기절한 척 연기했다. 그런데 심부름 가던 다른 애와 눈이 마주쳤고,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날 처음 ‘얼굴이 화끈하다’는 감정을 실감했다. 나는 배우가 되었어야 했나 보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별종이다.
빨간 구둣주걱으로 혼내시던 아빠는 이내 무릎에 앉히고 “아빠가 때리고 싶어서 때린 게 아니다”라고 달래셨다. 어린 마음에도 ‘병 주고 약 주고’라는 표현을 몰랐을 뿐, 그 감정은 분명 느꼈다. 지금도 아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너처럼 말 안 듣는 애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어.”
나는 덜렁거림의 대명사였다. 준비물이나 실내화 주머니를 거의 매일같이 놓고 왔다. 현관에서 신발 신다가 거울 한 번 보다 그대로 놓고 오기 일쑤. 집이 가까워 쉬는 시간마다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해 애걸복걸하곤 했다. 선생님들은 해마다 입을 모아 “주의 산만”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나름 잘 크지 않았나?
추석이면 사촌들과 논두렁에서 폭죽놀이를 했다. 사촌오빠가 불 끄겠다고 폭죽을 걷어찼는데, 하필 내 웃옷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쥐불놀이하다 새 외투를 태운 일도 있었다.
수영장 다녀오는 버스 안에서 먹던 과자와 축축한 머리에서 풍기던 기념품 샴푸, 린스, 비누세트의 향.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코끝에 남아 특이하게 향기롭던 그 냄새는 아직도 가끔 떠오른다.
초등학교 6학년, KFC에서 생일파티를 열고, 보아의 1집 카세트테이프를 선물 받았던 날. 난생처음 가져본 유행가 카세트테이프였다. 유아복을 벗고 헬로키티, 베티붑에서 옷을 골랐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청소년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