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 4세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들은 마치 먼지 낀 유리창 너머의 풍경처럼 희미하지만, 어떤 장면들은 이상할 만큼 또렷하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 뒷자리에 앉아 유아원에 가던 아침들. 창밖에는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엄마가 나를 내려주고 선생님께 인사한 뒤 떠나면 나는 창문에 매달려 울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푸른 눈의 선생님들과 금발 아이들 사이에 섞여 나는 혼란스러웠을까. 두려웠을까. 그 감정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작은 몸이 낯선 세상 속에 놓여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유아원에서는 몰래 선반 위에 놓인 과자를 꺼내 먹으려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적도 있었는데, 그 일로 '혼자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 벌을 서야 했다. 지금도 그 순간의 민망함이 생생하다. 그래도 집에 돌아오면 금세 신나서 발레리나 옷으로 갈아입었다. 끝까지 기죽지 않는, 잡초 같은 아이였나 보다. 늘 뭔가에 들떠 있었던 나는 발끝을 보지 않고 목표 지점만 바라보며 달리다가 자주 넘어졌고, 하도 자주 넘어지다 보니 선생님이 내 균형 감각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며 병원에 가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외할머니와 함께 집 뒤 호수에 갔던 날도 잊히지 않는다. 하얀 오리인지 거위인지 모를 새들이 떼 지어 다가오자, 나는 놀라서 울며 할머니 다리에 매달렸다. 그런 내 옆에서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바나나를 떼어주시던 장면이 아직도 이상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가 무섭다. 아직도.
어느 여름날, 집 앞에서 젤로 파티가 열렸던 날도 있다.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까지 커다란 튜브 풀장에 담긴 젤로를 퍼먹으며 놀고, 플리마켓 구경도 하고, 얼굴에 페인트도 칠했다. 마지막에는 무슨 순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젤로 풀장에 발을 담그고 뭔가를 찾는 놀이로 마무리했었다. 다시 젤로를 먹고 싶었지만 이미 발을 담근 뒤라 먹을 수 없어서 서운했던 기분이 지금도 아련하다.
동생을 처음 만나러 가던 날은 특별했다. 병원 주차장에서 엄마에게 가져갈 미역국이 담긴 보온통을 들여다보며, 이모들 품에 안겨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복도를 지나갔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였던 엄마의 얼굴, 그 낯설고 신비로운 순간에 나는 숨을 죽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주 따뜻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느 날은 보물 찾기를 하고 싶었는지, 교회에서 부활절 계란 찾기를 해본 기억 때문이었는지, 괜히 엄마의 결혼반지를 풀밭에 던져놓고 안 찾아져서 당황했던 적도 있다. 또 다른 날은, TV를 깨끗이 닦고 싶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무기로 화면에 물을 잔뜩 뿌려 고장을 내버렸고, 그날은 정말 귀에 피가 날 정도로 혼이 났다.
엄마는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자주 숨겨두셨다. 어려서부터 물욕이 남달랐던 나 때문이었을 거다. 어느 날 사촌언니에게 줄 디즈니 비디오테이프를 숨기셨는데, 나는 이미 그런 것들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결국 비디오가 없어진 걸 눈치챈 엄마에게 떼를 쓰며 엉엉 울었던 기억도 있다.
옆집 친구와 놀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가 났던 날도 있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물컵에 물을 담아 친구 얼굴에 그대로 뿌려버렸다. 어디서 보고 배운 건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느꼈던 미안함은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역시 성악설이 맞는 건가.
이 모든 기억들은 조각조각 흩어진 채로 내 안에 살아 있고, 나는 이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보며 내가 어떤 아이였는지를 되짚어본다. 어리석고 엉뚱하고, 때로는 잔인하고 사랑스러웠던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