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겨울 (2025)

by 최은영

“그땐 뭐가 그렇게 힘들었어?”


나는 한동안 대답할 수 없었다. 글쎄. 무엇이 그렇게 버거웠을까. 시간이 흐르면 사건은 흐릿해지고, 감정만이 오래 남는다. 내 기억 속에는 사건의 진실보다 감정의 잔향이 남는다. 역시 나는 감정형 인간이다.


돌아보면 내 삶은 늘 빠듯하고 팍팍했다. 어느 하나 삐끗하면 모든 것이 멈춰 버리는 톱니바퀴 같았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 이사한 지 일주일 만에 학기가 시작됐고, 새벽 여섯 시에 나가 밤늦게 돌아와도 과제와 실습은 끝이 없었다. 새벽 두세 시에 겨우 눈을 붙인 뒤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폭설이 쏟아지던 날을 잊지 못한다. 장도 봐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차는 눈에 매몰돼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다. 배터리는 방전돼 있었고, 간신히 정비소를 찾아 해결하고 돌아오니 이번엔 전기가 나갔다. 목구멍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왜 이런 일들은 연달아 일어나는 걸까. 근처에 사는 룸메이트들의 부모님은 매주 냉장고를 채워주고 필요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 주시기도 했다. 그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눈물 나게 부러웠다. 나는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삶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그래도 그 속에서 배운 것이 있다.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내 안에 꺾이지 않는 여름이 있음을 알게 된다.” 버티고 나면 알게 된다. 불운을 벗어나는 길은 결국 문제를 헤쳐 나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지난 10년은 끝 모를 겨울 같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얼어붙는 듯했고, 나무 한 그루 없는 벌판을 혼자 걷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쯤 인지도 모를 긴 터널 속에서 무수한 밤을 세며 앞이 아닌 발끝을 보며 걸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렇게 겨울의 시간을 건너왔다.


그 시간을 통과하고서야 분명해졌다. 모든 고통에는 한계가 있다. 그 지점에 닿으면, 고통은 사라지거나 다르게 변해 삶의 색채를 띠게 된다. 임계점을 넘어서면 그것은 더 이상 나를 무너뜨리거나 질식시키지 못했다. 견딜 수 있는 무게로, 삶의 일부로 스며들었다.


내 삶의 복잡함은, 누구나의 삶과 마찬가지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나로 사는 일이 어떤 대가와 고통을 품어야 했는지, 누구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타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희망과 어둠을 지나야 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계절을 각기 다른 방식과 무게로 건너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의 보이지 않는 겨울을 헤아리며, 조금 더 서로에게 다정해야 한다.


2023년 4월 26일.

나의 겨울이 끝나가나 보다.


이렇게 적어두고도, 오늘의 이 글을 쓰기까지는 2년이 넘는 시간이 더 걸렸다. 오늘의 나로 다시 회복되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회복의 전부는 아니라 했다. 하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으로 돌아오는 일, 그게 먼저였다. 오래 헤맨 끝에 작은 열쇠 하나를 손에 쥔 듯, 기쁨이 서서히 차오른다.


이제야 비로소 뭐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그 긴 시간을 견뎌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여유 있는 느릿한 호흡으로, 다시 무언가를 짓고 싶다. 조금은 부서지고 금이 간 자리 위에, 다시 집을 짓듯, 다시 이야기를 만들 듯. 그 곁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의 겨울을 건너온 이야기들을 나누며, 따뜻한 것을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


모든 계절에는 끝이 있고, 그 끝에서 나는 이전보다 더 따뜻해진 나를 만난다. 이제는 더 이상 고난의 의미를 찾지도, 애써 피하려 하지도 않는다. 고난도, 불안도, 감기도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또 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다.

이전 17화내가 좋아하는 것들(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