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나의 미래가 온전히 내 어깨 위에 놓여 있다는 생각에 나는 냉철한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지만, 정작 몸과 마음은 고장 난 기계처럼 비명을 지른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강박이 역설적으로 나를 더 깊은 무력감으로 밀어 넣는다.
어린 시절, '나를 찾는다'는 말은 내게 농담처럼 들렸다. 이미 여기 숨 쉬고 있는 나를 대체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하지만 중년의 문턱에서야 깨달았다. 나를 찾는다는 건 보물 찾기가 아니라, 남들의 박수 소리와 세상의 기준 아래 겹겹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본연의 형체를 드러내는 작업임을. 누군가는 사춘기에 끝냈을 이 숙제를 나는 이제야 붙들고 있다. 하지만 갱년기의 절망 속에서 깨닫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몇 년 전 세워둔 원칙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나는 생각하는 인간이기에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일들을 우선 하자'. 머리로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정답은 삶이라는 실전에서 자주 무력했다.
1월의 기백은 한 달 만에 방전되었고, 아빠는 자꾸 내 인생의 시계가 '겨울 오후 세 시'라며 재촉하신다. 곧 해가 떨어질 거라는 불안. 불이 난 집에 홀로 남겨진 듯한 공포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 혼란이 이어졌다.
‘나,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이것저것 묻던 의사는 내게 말했다.
"시간에 대한 조급함이네요."
의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안에서 조급함을 발견한 의사조차 다음 환자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 그만하라는 데스크의 전화, 즉 시간의 압박에 쫓기고 있었다. 진단도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문 밖으로 떠밀려 나왔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진료 수가가 낮으니 박리다매 형태로 진료 볼 수밖에 없겠지. 이 분도 어쩔 수 없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해를 하면서도 한 켠으로는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마음에 실망이 내려앉았다. 다음을 기약해야지.
시간에 대한 조급함이 짙어질수록, 젊음은 순간이고 인생은 짧다는 감각이 피부로 느껴질수록, 누구나 마지막 한 발 남은 탄창을 확인하며 초조해하는 병에 걸린다. 나에게도 마지막 한 발이 남아있다. 아니, 남아있나?
한 사람의 행복은 결국 상실과 슬픔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트라우마로 가득 찬 사람이다. 불행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살아내기에 급급해 상처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자아만 남았다.
겨울의 오후 세 시는 곧 해가 질 시간이기도 하지만, 이때의 햇살은 하루 중 가장 길게 뻗으며 숨겨진 굴곡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림자가 가장 길어지는 이 시간이야말로, 내 삶의 트라우마와 상처를 가장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셈이다.
2월의 절반을 다시 불안에게 빼앗겨 버렸지만, 그래도 아직 남은 절반이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안심으로 다가온다. 조금 느려도, 조금 서툴러도, 심지어 지금처럼 무너져 내려도 나의 존재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걸 이번에는 조금만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빠는 아직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해가 지기 전 오후 세 시의 햇살은 가장 길고 뜨거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