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소개팅 2 - 스무 번째 첫 만남

by 최은영

2026. 3월


죽어도 자만추를 외치던 내가 결혼이 하고 싶어 결국 소개팅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렇게 죽도록 싫은 소개팅을, 자꾸만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그 지난한 만남들을 반복하면서 비로소 배운 것들이 있다. 흔히들 소개팅에 성공하려면 무조건 많이 만나봐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 같지만, 막상 겪어보면 전혀 당연하지 않다. 소개팅에 의존해 사람을 만나다 보면 수도 없이 내 근간을 뒤흔드는 현타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할 때 한 번, 그래도 희망을 안고 나갔다가 실망하며 또 한 번. 역시 이건 아닌가 싶으면서도 여기저기서 들어온 소개팅에 다시 희망을 걸어보고, 너무 조건 따지지 말라는 말에 떠밀려 나갔다가 또 한 번. 다른 결정사로 갈아타고 나서도 이어지는 실망감 속에 그 굴레를 버텨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다 스무 번째 첫 만남쯤이었을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마침내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처음으로 마음이 한없이 편안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내 마음이 비워져서였을까, 아니면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을까. 그래, 이런 사람을 만나면 되는구나, 이런 만남도 있고 이렇게 연결될 수도 있구나 하는 걸 그 사람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제야 '아, 소개팅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동안은 혹시 이상한 사람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 그럼에도 잘 보이고 싶다는 조바심, 그리고 혹시 운명의 상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늘 복잡하고 버거운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편안한 자신감으로 임하자 비로소 좋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설령 한두 번 이상의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충분한 채움과 배움이 되는 시간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겪은 또 하나의 신기한 경험이 있다. 사회 초년생일 때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음에도, 나는 본래 고가의 물건에 큰 욕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개팅 자리만 나가면 그렇게 주눅이 들었다. 행여 상대가 나의 행색만으로 나를 판단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 만들어낸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물질적인 것보다 쓸데없는 것에 주눅 들어 있는 내 볼품없는 태도가 훨씬 더 매력 없었을 텐데 말이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듯한 무례한 시선들은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나를 작아지게 했다. 어느 날 벼르고 별러, '평생 쓸 가방 딱 하나만 사는 거야' 하는 마음으로 고심 끝에 마음에 드는 가방 하나를 장만했다.


그런데 막상 가방을 손에 넣고 보니, 마음 한구석이 흡족해지거나 내 가치가 올라간 느낌이 들기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내가 상대방이 외제차를 타고 명품으로 치장했다고 해서 더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듯, 진짜 나에게 맞는 사람이라면 그런 허영심 가득한 잣대로 나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미 내 나이쯤 되면 그런 것들은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다는 걸 알 테고, 인생에서 그런 껍데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나만큼 아는 사람이어야 내 운명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 인생에 필요한 파트너는 단 한 사람뿐인데, 나는 왜 그토록 모두의 마음에 들고 싶어 전전긍긍했을까. 가방은 단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만, 적어도 남에게 증명하기 위해 들 일은 없을 것이다. 가방 하나 값으로 얻은 참 값진 깨달음이었다.


소개팅으로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흔히들 세 번 정도 만나보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면 합의 하에 두세 번 더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직관적인 느낌이나 대화를 통해 대부분 알 수 있지만, 반드시 시간이 지나야 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전반적으로 대화의 결이 잘 맞는지, 정서적 안전감, 그리고 외적인 끌림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무난하게 잘 지나갔다면 두 번째 만남에서는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며,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관찰해 본다. 그렇게 서너 번째 데이트를 이어가다 보면 깨닫게 된다. 불꽃같은 강렬한 스파크가 일지 않더라도, 서로에게 거슬리는 부분이 없고 소통 방식이 비슷한 다정하고 차분한 사람이 바로 내 이상형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는 분명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답게 최선을 다하고, 가장 나다워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며 나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찾아가는 일. 조금 늦었을지 몰라도, 이제야 나는 편안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좀 더 완성형에 가까워진 지금의 내가, 역시 자기만의 완성형에 가까워진 인생의 파트너를 찾는 요즘. 그래서 나는 "좀 더 일찍 결혼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그리고 앞으로 찾아올 그 편안한 인연이 온전히 기대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