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이코틱

존 케닉, 슬픔에 이름 붙이기

by 양동이

(형용사) 대단히 놀랍다고 생각되는 무언가ㅡ명반, 좋아하는 식당, 친구가 운 좋게도 처음으로 보게 될 텔레비전 프로그램ㅡ를 친구에게 애탈 만큼 흥분되는 마음으로 소개해 주고는 당연히 경탄이 터져 나오길 기다리며 계속해서 친구의 얼굴을 살피지만 그 모든 작품의 결점이 처음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깨닫고는 움츠러들 뿐인.


어원 고대 영어 licodxe[그것이 (당신을) 기쁘게 했다.] + psychotic(정신병을 앓는.)



그런 적 있지 않은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나 정말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이 친구의 인생 최악의 작품인 경우. 한 곡만 반복해서 들을 정도로 좋아하던 밴드 음악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듣고는 너무 시끄럽다, 부정적이다, 머리 아프다는 평을 남긴 적이 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지 하고 받아들이다가도 한 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취향이 다를 뿐임에도 모든 자신감을 잃고 앞으로 추천은 하지 않겠다 다짐하기도 한다. 자신과는 다른 가치를 가진 이에게 실망스럽기도, 좋아하던 노래가 갑자기 별로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문제 삼을 필요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자. 작품성으로 추천받은 영화의 개연성이 부족하다 느끼거나, 가사 좋다는 노래의 멜로디가 마음에 안 들거나, 평론가가 극찬한 작가의 섬세한 문체가 오히려 어지럽게 느껴진다 하는 경험. 당신도 똑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타자화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타인을 타인 그 자체로 보는 것.


우리는 대개 모임 속에서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움츠러든다. 그들과 나의 어떠한 지점이 동일하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차별성을 갖길 원하기 때문이다. 교집합과 공집합, 멋과 애정의 정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이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어필해야 한다. 그래야만 모두가 관심을 갖게 될 테니까. 일종의 말할 권리를 찾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와닿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오만에서 비롯한 일종의 자기 검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생각과 행동은 나의 것.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당신뿐이다. 변명도 습관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도록 하자.





감정이란 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이면 얼마나 좋을까. 명확하지 못한 감정은 영영 부유하다 엉켜 버리고 말아 또다시 헤매게 한다.

첫 번째, 부정하지 않기. 아무리 부정한들 한 번 찾아온 감정은 떠나지 않는다. 조용히 숨어 있다 언젠가 또다시 깜짝 놀라게 하기 마련이니 괴로움을 자처하지 말자.

두 번째, 말로써 표현하기. 그저 생각으로 뭉뚱그리는 것과 단어로써 정의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매듭을 푼다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단어를 나열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거절당할 용기. 때론 도전하는 용기보다 포기하는 용기가 더 멀게 느껴지는 법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오롯이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란 것을 잊지 말 것.



이것은 내가 가장 새겨야 할 이야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크리설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