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들어주면 안 돼요?
며칠 전 기분이 나빴던 일에 대해 저녁식사를 하다 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냥 웃어넘기라고, 어차피 여긴 문화도 사람도 다르니까 그 상대에게도 이유는 있었을 거라고.
나는 대답했다. "Sì, però non mi sentivo bene!" 그래, 그치만 나는 기분이 안 좋았다고!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느끼고 성찰했는지를 묻는 그에게 돌연 화가 났다. 누군가와 나누면 가슴에 쌓인 돌덩이를 조금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어렵게, 하지만 너무 진지하지는 않게 꺼낸 이야기였다.
내가 원했던 반응은 "그래, 너 참 많이 놀랐겠다. 기분이 나빴겠구나. 화는 나지 않았니?" 였던 것 같다. 나의 이성적 이해와 성찰이 아닌 감정에 대한 질문, 그 너머의 공감을 원했던 것 같다. 나에게 스며든 감정의 색깔 그대로를 받아주었으면 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실은, 나 자신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머물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는 '내가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뭐지? 뭐가 잘못된 거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느새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경험하고 느끼는 자아(Experiencing self)도 관찰하는 자아(Observing self)도 모두 나이거늘, 경험하고 느끼는 나의 입은 어느새 봉쇄되고 관찰하는 나의 눈만 열려 온전한 나로서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다. 되살아난 과거에 아프다 울부짖는 내 목소리를 들어줄 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내게 많이 아프고 무서웠겠다고 안아주고 달래줄 나의 입과 품이 필요하다. 관찰하는 나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나로서 나를 이해하고 동반하기 위해 눈의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상대방의 무례한 언행에 대해 기분이 안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무서웠고 또 화가 났다. 하필 그는 내 과거의 상처를 건드렸던 것이다. 내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하는 건 나 자신이다. 나에게는 예민하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내 삶의 순리인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어쩌다 내게 튀긴 작은 물방울은 마치 폭포수와도 같은 힘으로 내 전신 위에 쏟아진다. 나는 완전히 이 아픔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한다. 악몽을 꾸다 깬 작은 아이가 사로잡힌 공포 속에 울고 있을 때, 나는 나의 엄마가 되어 아이를 꼭 안아주고 이야기한다. "괜찮아, 아가야. 엄마가 여기 있단다." 그 울음이 진정될 즈음 나는 내 사랑과 힘을 느낀다. '숨을 쉬고 있구나, 아! 내가 살았구나.' 그제야 내 관찰하는 자아의 눈빛이 살아난다. 나는 생존했다. 그 죽음의 터널 속에서도 버티고 버텨 살아났다. 그 상처가 비록 깊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덧날 염려가 없을 정도로 깨끗해졌다. 비록 가끔 스치는 찬 바람에 다시 아픔을 느끼긴 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다. 현실의 나는 나를 공감해 주고 돌볼 수 있는 힘이 있는 나다.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는 나를 느끼면서 차올랐던 화를 모두 뱉어버린다. 내가 바랐던 건 그냥 나로 존재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나의 마음이 느끼고 말하고 또 그것을 바라봐주고 들어줄 수 있는 나로 자유롭게 현존하는 것, 그 작은 소망이 참 곱고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