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기

난 괜찮아

by 어엿봄

어젯밤 오랜만에 글을 쓰고 발행 버튼을 눌렀는데 로그인 창이 새로 떴다. 임시저장 된 글을 불러오니 겨우 첫 단락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짜증이 확 났다. 사실 이런 일이 흔치 않은 건 아니다. 드라이브 포맷 전에 백업을 제대로 안 해서 중요한 폴더를 통째로 날린 적도 있고 인쇄나 복사도 해놓지 않고 파일 위에 덮어쓰기를 하는 바람에 날린 적도 많다. 잃어버린 건 그래, 그렇게 다시 살릴 수 없이 놓쳐버린 것들이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나고 무엇보다 속상했었다. 그럴 때마다 방법은 단 하나였다. 현실을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제 글의 요지는 대략 이러하다.



세상을 떠나 일주일 간의 피정을 다녀왔는데, 이 피정이라 함은 나의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때다. 침묵 속에 잠기고 싶었다. 차가운 호수의 바람이 너무 거세 나를 흔들어 놓고 있을 때 나는 뿌리 깊은 나무에 단단히 나를 묶길 원했었다. 마음 흐트러트리지 않을 고요함과 차분함이 참으로 그리운 삶이라 일 년 중 딱 이 기간만큼은 나는 모든 것을 다 닫고 깊이깊이 내려간다. 피정집이 제공한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그래서 사실 나에겐 크게 와닿지 않았다. 천천히 나의 땅을 밟고 다져갈 시간과 공간만이 필요한 나였다. 하지만 숲에 가려면 정문을 나서야 했고, 세상으로 나아가 침묵을 깨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거기 그렇게 머물렀다.


나는 주님을 뵈었고, 그분의 눈에 비친 나를 보았으며 또 내 눈에 비친 세상을 보았다.


피정을 마치면 늘 열매를 수확하고 그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런데 왜 열매의 맛을 잘 모르겠지?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지치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오랜만에 비가 많이 쏟아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몸이 정말 무거웠다. 가라앉는 몸을 두고 티라미수(Tiramisu; 나를 당겨 올려 줘!) 생각이 난 밤이었다. 커피 향에도 쉽게 취하는 나는 카페인과 상극이기 때문에 그 맛있다는 티라미수를 먹지 않는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작은 속임수였다. 방 안에 처박아둔 아무 맛없는 비스킷을 한 입 물고 "아, 달콤해!" 하고 외치는 일 말이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티라미수 한 스푼을 떠먹은 듯한 표정을 하고는 만족해하는 것이다. 그때에 거센 호수의 바람은 잔잔한 미풍이 되어 내 안의 꽃들을 간지럽힐 것이라 상상했다.



다시 쓴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경쾌하고 밝게 손을 놀려 글을 쓴다. 오늘은 하늘이 어제보다 더 파랗다. 그리고 오늘은 도서관에 왔다. 피정 가기 전에도 도서관에 왔었다. 일상에서 벗어났던 그 시간을 새롭게 이해하고 살아내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나아가기로 한다. 내가 새로워졌다면, 내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은총과 사랑 속에 다시 태어났다면 모든 것은 새로워져야 한다.



적어도 바뀐 척이라도 한번 해볼까?

그래, 내 방에 숨겨 둔 티라미수를 찾아봐야지. 진짜 티라미수가 아니어도 괜찮아.

당신은 속지 않아도 나는 잠시 나에게 속아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달래며 다시 시작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