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비르지타 축일] 사랑의 열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갈라 2,20)

by 어엿봄

* 오늘은 유럽의 수호성인 비르지타 축일 전례력을 따릅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 2,19-20)


피정 다녀온 후 어느 날 마음을 딱 울린 말씀 한 구절이 있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아니 그러니까 나 자신을 버틸만했다. 내가 짊어지기 무거웠던 건 세상도 아니었고 그냥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시고 그분께서 모든 것을 취하신다니 나는 그러한 연유로 나의 가난함과 약함을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꽉 찬 느낌이었다.


사랑으로 꽉 찬 마음이 늘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햇볕 잘 드는 밝은 곳으로 나아가 그 꽉 찬 마음을 환히 들여다볼 때가 있는 반면, 어두운 그늘로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주춤거리는 내 안에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사신단다. 오늘의 말씀은 그 약속의 확인이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단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나 역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던 역사가 있었다. 내가 괴로워했던 많은 순간들에 나는 나를 탓하였다. 누군가로 인해 아팠다 할지라도 나는 내가 더 아프길 원했기에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렸다. 많이 외로웠고 비참했지만 그래도 살았다. 살아내야만 했다. 그게 그 불특정 한 죄에 대한 대가요, 또 죄를 이기기 위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마흔 해를 살아내며 생각한다. 지금은 달라져야 할 때다.


나의 고통 뒤에 사랑이 있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파할 수가 없다. 만일 그대가 누군가로 인해 눈물 흘리고 있다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 인생이 행복하지 않아 슬프고 괴롭다면 사실 그건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해서 행복을 빈다. 사랑하기에 비참함을 느낀다. 나 역시 사랑했기에 그 누구도 아프지 않길 바랐다. 잘 풀리지 않는 일에 속상하고, 진통제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몸에 힘들다면 기억하자. 다 나를 사랑해서다. 병약한 몸도 마음도 불쌍하게 느껴진다면 그게 다 나를 사랑해서다.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마흔 해를 살았으니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다.


사실 우리 주님은 나의 고통을 보고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의 희생과 노력을 보고 나를 구원하지 않았다. 내가 아파하기 이전부터 그분의 시선을 나를 향해있었으니 그저 내가 좋아서 나와 함께 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먼저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 때문에 그분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살리셨다. 내 안에 오셨다. 그러한 사랑이 내 안에 있다면 나는 그저 있는 존재만으로 참으로 소중하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 느낌이 참 좋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느끼는 이 순간이 참 좋다.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다.


사랑으로 인해 아픔을 견디는 게 아니라 그 사랑 때문에 아픔을 낫게 하는 삶을 살 때다.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고 나 역시 그분 안에 머무르니, 이 함께함은 더욱 큰 사랑이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열매를 충분히 아니 차고도 넘치도록 엄청 많이 맺을 것이다.




이전 07화[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님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