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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살의 할머니를 만났다

by 마레


오래전, 모잠비크 북부 낭뿔라로 향하는 여행 중이었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멈춰선 곳은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었고, 그 주변으로는 전통 가옥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타는 듯한 햇볕 아래, 하염없이 다음 차를 기다리던 중에 한 젊은 여성을 보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는 품에 안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평화롭고 정겨워 말을 걸었다. “아기가 정말 예쁘네요. 몇 개월이에요?”

내 물음에 수줍은 미소를 띤 여인은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고마워요. 제 손녀딸이에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손녀딸이라고?’ 내 귀를 의심하며 그녀의 앳된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아무리 보아도 20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할머니라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실례를 무릅쓰고 나이를 묻자, 그녀는 자신이 아마 서른넷 혹은 서른다섯 살일 거라고 답했다. 그녀는 10대 중반에 첫 딸을 낳았고, 그 딸이 자신처럼 10대 중반에 아이를 낳아 그녀를 할머니로 만든 것이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눈앞의 이 이야기가 한 여성의 놀라운 사연이 아니라, 그 땅의 수많은 소녀들이 대물림하는 삶의 한 단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삶의 중심에는 ‘성년식’이라는, 전통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회적 통과의례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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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를 씌우는 사회적 통과의례

내가 만났던 그 젊은 할머니의 삶은 바로 이 ‘성년식’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잠비크 일부 지역에서 행해지는 소녀들을 위한 성년식은 단순한 기념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준비된 아내’를 만드는 체계적인 사회화 교육 과정에 가깝다. 소녀들은 이 의식을 통해 남성에 대한 순종, 결혼 생활의 의무, 그리고 출산과 양육에 대해 배운다. 성년식을 통과한 소녀는 지역사회로부터 ‘결혼할 준비가 된 완전한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이제 소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동체의 규범과 가족의 압박 속에서 성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한 소녀의 고백은 이 현실을 아프게 증언한다. “내가 성년식을 마친 후, 나의 부모님은 내게 결혼하라고 조언하셨다. 그분들은 내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내 남편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부모님께 순종하길 원했고 그래서 결혼했다. 당시 나는 14세였다.” 이 목소리는 성년식이 어떻게 개인의 선택권을 박탈하고 조혼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기제로 작동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회적 규범은 곧 굴레로 작동하며, 이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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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어른'의 대가

성년식에서 조혼으로, 그리고 이른 임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마치 정해진 수순과도 같다. 성년식 관습이 깊게 뿌리내린 지역일수록 소녀들의 첫 성경험 연령은 현저히 낮아지고 조혼율은 급격히 치솟는다. 지역사회의 어른들은 소녀들에게 ‘어른이 되는 것은 임신과 결혼을 통해 실현된다’고 가르친다. 이들에게 십대 임신은 피해야 할 실수가 아니라, 성인 여성으로서 당연히 완수해야 할 과업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피임에 대한 무지와 접근성의 부재는 비극을 가속화한다. 연구에 따르면, 모잠비크의 15-19세 기혼 여성 청소년 중 피임약을 사용하는 비율은 불과 5.8%에 그친다. 성인 남성과의 관계에서 피임을 요구할 힘도, 관련 지식이나 수단을 얻을 기회도 없는 소녀들에게 계획되지 않은 임신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성년식은 이렇듯 소녀들을 보호받고 성장해야 할 청소년기에서 곧바로 성인기로 진입하도록 내몬다.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된 대가는 혹독하다. 신체적으로 채 성숙하지 않은 소녀의 몸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는 높은 모성 사망률과 신생아 사망률로 직결된다. 더욱 끔찍한 모순은, 나이 든 남성들이 HIV 감염의 위험을 피하고자 어린 신부를 선호하는 관행 속에서, 정작 소녀들은 치명적인 질병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사실이다. 모잠비크의 HIV 유병률이 12.4%로 세계 6위인 상황에서, 15-24세 여성의 감염률은 같은 연령대 남성보다 3배나 높다.

건강의 위협뿐만이 아니다. 이른 임신과 출산은 곧 학업의 중단을 의미한다. 책과 연필 대신 아기를 안게 된 소녀들은 교육을 통해 빈곤의 고리를 끊어낼 기회를 영원히 상실한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어머니의 삶을, 또 그 어머니의 삶을 대물림하게 되는 것이다. 성년식은 결국 한 세대의 가능성을 앗아가고, 빈곤과 젠더 불평등의 악순환을 더욱 공고히 하는 셈이다.



u4682669196_Young_African_schoolgirl_cradling_infant_wearing__97023b25-ef5a-47a3-86aa-44a0079e3fd9_0.png 이미지는 AI로 생성된 것으로, 실제 인물이 아닌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느리지만 분명한 진전

그러나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최근 모잠비크를 비롯한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전통을 지키되 위험 요소를 제거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성년식에서 남성에 대한 순종 대신 소녀의 권리를, 성생활 교육 대신 위생과 건강 교육을 가르치는 마을들이 생겨나고 있다.

모잠비크 정부도 2019년 혼인 가능 연령을 18세로 상향 조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시민사회와 국제기구들은 지역사회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인식 개선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모잠비크의 15세 미만 조혼율은 14%에서 10%로 감소했다. 느리지만 분명한 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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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뿔라의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던 서른다섯 살의 할머니,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갓 태어난 손녀딸의 얼굴을 다시 떠올린다. 그녀의 딸 역시 이제 막 십대를 지나는 어린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축복받아야 할 탄생이, 한 세대의 고단한 삶을 다른 세대에게 고스란히 대물림하는 굴레의 시작이 되는 현실. 이 비극의 고리는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성장’과 ‘어른이 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 소녀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날개를 선물 받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을 때,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마련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한 사람을 진정한 어른으로, 성숙한 사회 구성원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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