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잠비크에서 탄생한 두 아기에 관한 기록
2007년, 나는 모잠비크 북부 니아싸(Niassa) 지방의 꾸앙바(Cuamba) 군에서 우물을 파고 수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고장 난 우물과 부족한 식수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나는 남아공에 기반을 둔 우물 파는 회사와 계약하여 여러 마을을 돌며 고장 난 우물을 복구하는 일을 했다.
어느 날, 나는 우물 펌프를 수리하기 위해 방문한 마을에서 한 가족을 만났다. 엄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고, 여섯 명가량의 자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집으로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덕분에 나는 이 가족의 일상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자, 엄마는 작은 그릇에 담긴 쌀가루 한 움큼을 가져왔다. 그녀는 그 쌀가루를 물에 개어 반죽을 만들었고, 아이들은 손으로 조금씩 떼어먹었다. 5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 남은 음식을 양보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이곳의 가난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이 가족의 진짜 이야기는 엄마의 품에 안긴 작은 아기에게 있었다. 보자기에 감싸인 아기는 너무 조용했다. 나는 호기심에 아기가 딸인지 아들인지 물어보며 보여달라고 했다. 엄마가 아기를 건넸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는 너무 가벼웠고 손끝으로 느껴지는 체온마저 미약했다. 2kg도 되지 않아 보였다. 엄마는 모유가 나오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걱정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아기의 이름을 물었을 때 엄마는 아직 이름을 짓지 않았다며 내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성경 속 열국의 어머니로 묘사된 사라(Sara)를 떠올렸다. 이 아기가 살아서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마침 우물 수리가 끝나고 떠날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들을 도울 방법을 알지 못한 채, 가진 현금 모두를 건네며 음식을 사라는 말만 남기고 마을을 떠났다.
후에 우물가에서 찍힌 사진 속 슬픈 표정의 엄마와 아기를 보며, 나는 무력감과 자책감에 빠져들었다. 사라가 살아남았을까? 몇 년이 지나도 나는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병원이 있고 의료진이나 의료 시설도 부족한 마을에서 사라가 생존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그 아기가 내 아이였다면 나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살리려 했을 것이다. 너무 쉽게 포기한 건 아닌지 자책하며 내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았다.
2023년, 나는 다시 모잠비크 북부를 찾았다. 이번에는 니아싸 지방의 모자보건사업 타당성 조사를 위해서였다. 지방 수도 리슁가(Lichinga)를 거쳐 꾸앙바와 메깡옐라스(Mecanhelas) 지역에서 산부인과 병동 지원과 의료 인력 강화를 논의했다.
나는 한국팀과 연계해 “꼬레이아(한국)"라는 이름을 제안했고, 모두가 웃으며 동의했다. 그 순간, 나는 2007년의 사라를 떠올렸다. 당시의 슬픔과 자책이 꼬레이아의 탄생을 통해 조금은 위로받는 듯했다.
조사를 위해 방문한 한 마을 보건소에서 만삭의 산모를 만났다. 그녀는 출산을 위해 분만실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옆방에서 의료진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녀가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분만을 도운 현지 산부인과 전문의는 산모와 아기가 모두 건강하다고 전했다. 우리는 산모 가족과 기쁨을 나누었고, 이때 가족 또는 현지 의료인 중 누군가 우리에게 아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16년 전, 나는 사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사라에 대한 기억은 내 안에 잊히지 않을 희망의 씨앗을 남겨주었다. 그 씨앗은 이제 꼬레이아와 함께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길로 자라나고 있다.
모잠비크 북부에서 만난 두 생명의 이야기는 나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강인한 생존력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부모들이 아이들의 생존 여부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함께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