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도 감자돌이도 하루를 사랑해
나는 화학을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코어가 불안정한 사람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불안정한 사람들은, 연애를 하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나는 내가 불안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안정성을 찾기 위해 애썼다.
말을 더듬던 시절엔 입을 닫고 살기도 했고, 때로는 반대로 더 많은 말을 해보며 고치려 했다.
다치거나 아파도 참고 버텼고, 가정이나 주변이 위태로워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려 했다. 안정이 추구하는 게 안정이란 게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문제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늘 안정이라는 것을 갈망했고, 그것을 쫓았다.
한창 방황하던 11월의 어느 날, 친구와 진탕 술을 마셨다. 우리는 취기 속에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
“불안정한 원소들은 안정성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까?”
“엄청 하겠지.”
“근데 내 생각엔, 서로 다른 전자가 와서 채워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먼저 채운 다음에 짝을 만나는 게 맞지 않을까?”
“그게 맞지. 금속결합보다 이온결합은 나중에 가야지.”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의 핵심은 이거였다.
불안정하든 안정하든 상관없다. 다만, 자기애를 채운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지금도 몇 안 되는 후회를 품고 있다. 더 좋은 상태, 시점, 상황에 만났다면 하루와 어땠을까. 하루 말대로 이미 행복하고 지나간 과거는 부질없는데 자꾸만 생각이 들었다.
서론이 길었지만, 사소한 것에 행복해하라는 하루의 말을 떠올리며, 지하철 출근길 에어컨 바람에도 감사함을 느끼며 이 글을 이어 써본다.
하루는 의외로 나와 대화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11월, 빼빼로 데이를 앞두고 하루와 데이트를 했다. 우리 둘은 부끄럼이 많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사진을 잘 찍지 않았다. 대신 조용한 골목에서 주위를 살피다 조심스레 찍곤 했다. 그리곤 그 당시엔 프사를 바꾸지도 않고 서로에게 사진을 전달하곤, sns에 올리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 커플은 보정이나 sns를 하지 않고 이쁜 우리의 울타리 사진관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날도 평소처럼 가볍게 술을 마셨다. 그 집이 하루의 취향에 맞아 자주 갔는데, 그날따라 하루가 유독 힘들어 보였다. 하루는 그 집 안주를 무지 좋아했다. 힘들 때 술을 마시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하루의 방식을 굳이 고치려 하진 않았다. 다만, 하루는 많이 취했다. 걸음도 비틀거렸고, 토할 것 같아 보였다.
밤 11시, 결국 나는 하루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그날이 내가 처음 하루의 자취방에 들어간 날이었다. 방은 마치 친누나 방처럼 소박했고, 그게 왠지 웃음이 났다. 하루는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가끔 말을 걸면 대답은 했지만,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기숙사로 돌아갈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불을 모두 끄고 바닥에 앉아 하루를 지켜봤다. 30분, 1시간쯤 지났을까. 하루가 잠든 채로 토를 했다. 울컥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하루를 깨웠지만 의식이 없었다. 일단 상체를 세워 토하도록 했고, 입가와 옷에 묻은 건 수건으로 닦았다. 다시 누울 땐 고개를 옆으로 돌려주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지만, 혹시 잘못 삼킬까 봐 입술만 살짝 적셔줬다. 스스로 삼킬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렸다. 침대며 바닥이며 엉망이 됐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하루가 깰 때까지, 혹시 또 토할까 봐 한숨도 못 잤다.
다음 날 아침, 하루가 힘겹게 눈을 떴다. 괜찮냐고 물으면서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내가 뇌전증으로 쓰러져 죽음의 문턱을 오갔을 때, 어머니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이게 진짜 ‘걱정’이라는 건가 싶었다.
하루는 주변을 둘러보다 당황스러워했다. 나는 웃으며 어젯밤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디 아프면 바로 병원 가자고 말했다. 해장하러 가기 전, 우리는 함께 방을 치웠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이불은 코인 빨래방에 맡겼다.
물론 내가 했던 처치가 옳았는지, 그릇됐는지는 지금도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루는 해장을 할 때 사실 맛보다는 국물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날도 하루는 "감동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당연한 일 아닌가? 누가 자다가 갑자기 울컥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을 계기로 하루는 나에 대한 마음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하루는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냄새나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옆에 있어줘서 감동이었다"라고 말해줬다. 나 역시 하루가 좋았다. 이때 나는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하루와의 관계를 그저 가까운 내일이 아니라 멀리, 오래 바라보며 이어가고 있었다.
12월이 지나고, 하루의 생일이 다가왔다. 꽃을 선물하고 싶었다. 살면서 어머니와 누나를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꽃을 건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문 앞에도 꽃집이 몇 군데 있었지만, 난 굳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하루의 느낌이 나는 꽃, 그냥 예쁜 것이 아니라 잔상이 오래 남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꽃을 주고 싶었다.
그날, 꽃과 함께 삐뚤빼뚤한 손편지도 준비했다. 하루가 경치 좋은 곳에서 보자고 한 날, 나는 꽃다발을 건넸다. 핑크로즈, 사랑의 맹세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꽃다발 속에 작은 꿀벌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어? 이게 뭐야?"
"하루가 예쁘니까 벌 친구도 축하하러 온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하루는 웃었고,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 역시, 그 순간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