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과 도피 사이의 미세한 경계
저녁 식사 도중 여자친구가 물었다.
요즘 들어 왜 사진을 잘 찍지도 않고, 브런치스토리에 올리지도 않느냐고.
“그야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 가치관 글이니까.”
그렇게 답했더니,
“그래도 사진 있는 게 좋은데 올렸으면 해. 분위기가 확 살더라!”라며 웃었다.
그래서 이번 글부터는 다시 사진을 올려보기로 했다.
잊고 지냈던 어느 순간의 장면이나, 출근길의 풍경을 가볍게 담아볼 생각이다.
배경사진은 힘들 때마다 여자친구가 건네준 작은 응원 부적이다.
이 부적을 보는 사람마다 조금의 행운이라도 스며들었으면 한다.
오늘 적어보려는 주제는 ‘자기 최면’이다.
사전적 의미로 자기 최면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긍정적인 암시를 통해 잠재의식을 조절하는 행위다. 명상과 비슷하지만, 자기 최면은 좀 더 직접적으로 감정·기억·내면의 이미지에 접근한다.
불안이나 두려움처럼 다루기 어려운 감정도, 눈을 감고 내면과 차분히 대화하면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가 있다.
하지만 자기 최면은 언제나 안전하지는 않다.
사실 이는 자기 최면뿐 아니라 대부분의 심리적 기법이 공통적으로 가진 양면성이다.
당장은 ‘긍정적인 믿음’처럼 보이는 생각이,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부정적 선택을 강화할 때도 있다.
혼자 살았던 2년의 시간이 있다. 내면도 외면도 동시에 무너져가던 시기였다. 가족도, 친구도, 기댈 곳도 없었다. 그때 나는 자기 최면을 시작했다.
“이건 하나의 기회다. 나만의 시간을 갖자. 더 성숙해지자.”
스스로에게 되뇌며 약 석 달을 버텼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에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성장을 위한 최면’이 아니라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대체 현실’에 빠져 있었다.
기억 속 가족의 모습과 목소리를 재현했고, 그들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떠올렸다.
그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을 대신하는 제2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최면 속 가족은 다정했고, 풍족했고, 안전했다. 폭력도, 욕설도, 결핍도 없었다. 그곳에서는 잠시나마 행복했다.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최면 밖 현실은 점점 더 무너지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켜졌다.
그 미묘한 괴리감이 결국 나를 깨웠다.
눈을 떴을 때 내가 마주한 현실은 비참에 가까웠다. 단수된 욕실, 전기가 끊긴 방, 바퀴벌레와 습기 냄새.
최면 속의 평온과는 너무나 달랐다. 처음에는 실망이 컸다. 다시 최면 속으로 들어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나는 하나의 진실을 받아들였다. 망상의 온기보다, 차갑더라도 살아 있는 현실이 낫다는 것을. “죽은 자보다 산 자가 낫다”는 말의 의미가 비로소 와닿았다.
자기 최면은 분명 감정 조절에 도움이 되는 심리적 도구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을 감추는 ‘도피처’가 되면, 최면은 치료가 아니라 의존으로 흘러간다.
나 역시 사랑하는 하루에게 의존하는 면이 있다. 고쳐야 할 부분이다.
누군가를 기대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마음의 공백을 외부에만 기대 메꾸려고 할 때 균형은 쉽게 무너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부적응적 상상몰입이라고 부른다. 잠시 위로하지만, 현실 기능을 약화시키고 감정 회피를 강화한다. 달콤하지만 오래 머무를수록 독이 되는 감정적 은신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온전히 나의 생각이다.
자기 최면은 감정을 정리하는 기술이지, 현실을 대체하는 집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비슷한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한 가지만 기억했으면 한다.
내면과 대화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대화가 현실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면은 나를 위로하는 동시에 천천히 갉아먹기도 한다.
결국 자기 최면은 균형의 문제다.
현실을 더 잘살기 위해 쓰면 힘이 되고, 현실을 피하기 위해 쓰면 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