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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연쇄의 해부(개정판)

마음의 상처가 생기지 않는 곳

by BaetZzo

마음의 상처가 생기지 않는 곳, 증오하는 사람과 증오받는 사람 없이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평등한 꿈같은 세상, 그런 지상낙원이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행복할 수 있을까?


8월 필자가 응원하는 밴드 음율이 첫 정규 앨범 ”환상설화“를 냈다. 사람들은 그전에 나온 뮤직비디오 만으로 세계관을 추측해 왔지만 앨범집에 공식 세계관을 다룬 소설이 동봉되면서 순수한 마음을 가진 특별한 ‘신소녀’가 그런 지상낙원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규칙을 지키고, 같은 행동을 하는 통제된 세상을 만들고, 그에 맞서 한때 그녀의 친구였던 실험체 출신 소녀 ‘이파란’이 ‘혁명’을 일으켜 변질되어 갇혀있는 신소녀를 구해낸다는 내용이 주이다. 뭔가 위화감이 든다. 확실히 신소녀가 이루어내고자 했던 세상은 지상낙원의 필연적인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신소녀의 바람과 달리 그녀가 만든 세상은 마음의 상처가 생기지 않는 곳도, 증오가 사슬을 이루지 않는 곳으로도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만들고자 한 세상은 과장을 보태서 1984에서 빅브라더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지옥도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지상낙원을 만들려다가 정반대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다룬 매체는 그렇게 드물지 않다. 앞서 말한 음율 뮤직비디오의 소설과 1984, 나루토에서는 승자뿐인 세계, 사랑뿐인 세계로 정의되는 ‘무한 츠쿠요미’, 심지어 현실에서도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의 양극화를 극복하고 프롤레타리아가 국가의 주인이 되는 이상사회를 내세운 공산주의 사상까지. 모두 작중 시점에서나 현대의 보편적인 시각에서 사탕발림 헛소리로 치부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심지어 실제로 증명되기까지 했다!(작중이든 현실이든)


우리는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지상낙원이라는 달콤한 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고 평등하기 위해선 아무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증명해 줄 누군가 ‘가 필요하다. 그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많은 혜택을 누릴 수밖에 없는데, 이 역시 필연적으로 계급의 분화로 이어진다.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원시 사회에서 고대 사회로 변화가 이행되는 동안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졌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너무나 진부하고 당연하지만, 너무나 중요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이다.


애니메이션에 능통한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사실을 증명해 줄 누군가’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지 않는 무한 츠쿠요미속 환술세계는 진짜 이상사회이지 않느냐?”라고.


실제로도 나루토 팬덤에서 사골이 우려 나오도록 거론되는 소재이다.(나머지는 이타치 vs지라이야의 전투력이다, 이 쪽은 전자에 비해 훨씬 비생산적인 주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반문에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꿈의 세계는 마치 구멍이 난 항아리처럼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사람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을 거라고.


만약 너무 운이 좋아서 세상이 골드버그 장치처럼 가능성만 존재한다면 로또 1등이든 슬롯머신 777,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밥먹듯이 뽑아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그런 사람은 우리 모두가 행복하다 말하겠지만 정작 본인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뇌의 보상회로는 마약중독자의 그것과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하던 결과가 정해진채 과정이 무의미하다면 그것은 1차원적인 쾌락과 다름이 없다. 마약 또한 직접적인 쾌락만을 일으키고 쾌락이 발생하는 과정 자체는 실질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능력이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약중독자처럼 보상회로가 망가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정해져 있고 행복만이 계속된다면 그 사람은 점차 유사한 강도의 쾌락으로부터 얻는 행복감이 떨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과정에서도 결과에서도 아무것도 얻을 수 얻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게 마약중독자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그러나 이 주제는 겨우 이 정도 피상적인 논리로 결론 내리기엔 너무나도 중대하다. 이 주제에 미성숙한 결론을 내려 죽어나간 생명의 역사는 아마 역사시대의 초기 이상까지 거슬러 갈 수 있는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도자들이 태평성대를 천명하며 결과물로 지옥도를 만들어 냈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이 주제를 분석해 보자. 모든 인간에게는 ‘권력 과정’이라는 욕구에 가까운 습성이 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생존에 필수적인 생물학적 욕구(식욕, 수면욕구 등)를 충족했을 때 권태가 온 이들이 어떠한 지향할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권력 과정은 1: 목표 설정, 2: 목표 달성을 위한 노력, 3: 목표 달성, 4: 자율성의 4가지 요소가 핵심인데, 간단히 요약하면 과정이 재밌어야 결과도 재밌고 그러려면 내가 그 과정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그리고 만약 생물학적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에 권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앞서 언급한 럭키가이나 마약중독자와 같이 보상회로가 망가진 인간으로 전락할 뿐이다. 그런데 무한 츠쿠요미의 환술세계는 1차적인 생물학적 욕구는 물론 권력과정의 욕구까지 완전히 충족시켜 버리는 지상낙원이다. 이 시점에서 권력 과정은 붕괴하기 시작하는데, 생물학적 욕구는 물론 대리만족을 위해 추구할 목표가 소실되면서 1번과 3번에 해당하는 요소가 무의미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이상사회에선 권력 과정의 주요 4요소 중 목표의 설정(시작)과 목표 달성(끝)의 두 가지 기둥이 먼저 붕괴되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2가지 기둥은 건재할까? 앞선 과정을 거쳐 시작과 끝이 무의미해졌다면 그 사이에 있는 ‘과정’은 어떠한 의미를 새로이 가지게 될까?


권력 과정에서 목표는 생물학적 욕구가 충족되고 난 자리를 대신하는 대리만족을 위해 설정하는 것이다. 즉, 목표를 설정할 때 그 목표는 달성시에 생물학적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만큼의 만족도를 선사할 수 있어야 권력 과정의 시스템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아무런 쾌락도 보장되지 않는 무가치한 일을 목표로 설정하는 것은 당연히 결과적으로 아무런 쾌락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앞선 2가지 기둥과는 반대로 과정만 있고 결과는 없다고 보면 된다. 아무런 결괏값을 내지 못하는 과정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 환술세계(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매체에 등장하는 지상낙원의 개념과 동일시해도 무방할 듯하다)를 지상낙원으로서 지탱해 주는 4 기둥 중 3개가 무너졌다. 마지막, 4번째 요소인 자율성의 부재는 자신이 권력 과정에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의미하는데, 이 기둥만큼은 표면적으로는 굳건해 보인다. 꿈의 세계에 자신을 제제할 존재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자율성의 부재는 꿈의 세계에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형태로 실현될 것이다. 꿈의 세계의 모든 것이 이상적이고 바라는 형태로만 이루어지고 움직인다면 그들은 자율성이 결여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자율적인 존재이지만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자율성이 결여된 것이다. 마치 신소녀가 바랬던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규칙을 지키고, 같은 행동을 하는 통제된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자신이 자율적인 세상의 부품으로 타율적인 존재에 불과한 현실과 정반대로 세상이 자율적인 자신의 부품인 타율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타율적인 세상에 둘러싸인 존재로서 자율성을 상실했는지에 대해 합당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철학적인 문제 이긴 하지만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이 그저 세상의 실체를 인지했는지 못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트루먼이 자율적인 존재인지 타율적인 존 재인지로 나뉜다면, 이 세상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무한 츠쿠요미 속 ‘자신’또한 타율적인 존재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관점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정의 내리는 가와 매우 흡사해 보인다. 노예는 주인에게 종속된 타율적인 존재로, 대부분의 자유를 상실하고 자율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주인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강제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어떠한 관점에서 주인은 생활력의 면에서 극히 무능하고 타율적인 존재로, 대부분의 생활의 편의를 자율적인 생활력을 가진 노예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아이러니함 또한 존재한다. 즉, 타율적인 노예에게 종속된 자율적인 주인 또한 실질적으로는 노예의 노예나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다.


자, 4가지 기둥이 모두 무너졌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심지어 작위적인 조작이 가능한 가상세계 내부의 가상세계(나루토-무한 츠쿠요미)에서조차 구조적으로 지상 낙원이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상 낙원의 궁극적인 목표인 증오의 연쇄를 끊는 것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 거기에 더해 필자는 증오의 연쇄라는 것이 끊어질 수 없고 끊어져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할 것이다.


필자는 앞서 증오의 연쇄는 인류의 역사를 관통한다고 말하였다. 이를 대변하듯 인류의 역사란 본디 선형으로 우상향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과정에서는 전쟁과 평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진보와 퇴화가 나선형으로 발생한다. 간단히 말해 외부는 원통의 형태를, 그리고 내부 구조는 나선형을 이루며 꾸준히 우상향을 이어나가 온 것이 인류의 역사의 발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스프링 구조라고도 부른다. 반대로 말하면 전쟁과 평화가 나선형을 이루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순간 원통의 우상향에 장애가 발생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부정하고 싶지만 전쟁과 평화가 나선형을 이루는 것을 증오의 연쇄와 동음이의어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래 사진에서 제시한 나선의 탑의 모델이 이를 효과적으로 증명할 것이다.

(다음에 연재 할 글에서 자세하게 설명해드릴 모델입니다. 그냥 참고만 해주세요^^)

그렇다면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보자. 유럽의 십자군 전쟁은 증오의 연쇄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전 탈환을 명목으로 수많은 무고한 이슬람 세력이 죽어나갔고, 그 과정에서 보복으로 수많은 유럽 기독교 세력 또한 피해를 입었다. 거기에 이어진 흑사병의 창궐로 인해 세계의 4분의 1에 달하는 인구가 사망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의미하고 어리 석어보이는 떼죽음이 전례 없는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르네상스이다. 십자군 전쟁에 재산을 투자한 수많은 귀족이 몰락하고 상인 계급이 융성하며 십자군 전쟁의 과정에서 전래된 이슬람권의 발전된 기술들이 교황의 권위가 쇠퇴하고 반작용으로 권한이 강해진 왕들의 후원을 받은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을 통해 꽃을 피우고, 아래로는 귀족들이 몰락하면서 자유민이 증가하여 총 세금 징수량이 증가하고 잉여 인구가 전쟁으로 감소해 1인당 토지 경작량이 늘어나고 재산의 상속이 이루어지며 불경기가 호경기로 전환되어 결과적으로 문화적. 경제적 번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쟁과 평화(증오의 연쇄)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현대 테크놀로지 사회로 우상향이 이어지게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이러한 역사상의 순환을 통한 발전은 서양사뿐만 아니라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정립한 중국사의 사분법 중 고대-중세-근세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다룰 것)


결론적으로 필자는 흔히 증오의 연쇄라고 괄시받는 전쟁과 평화의 대물림이 얼핏 보면 어리석은 인간의 욕심이 자아낸 끝없는 재앙의 수레바퀴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극히 바람직하고 필연적인 현상임을 말하고자 한다.


물론 군대를 다녀오지도 않고,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아온 필자와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치킨호크라 불러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실제로 막상 눈앞에 총검이 들이대졌을 때 필자가 앞서와 같은 말을 소신 있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 현대 사회는 증오의 연쇄를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무나도 강력해진 핵무기들로 인해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면 공멸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평화의 추가 전쟁의 방향으로 기우는 것을 우리는 필사적으로 막고 있다. 그럼에도 언제까지나 증오의 연쇄라는 선물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자는 고착화된 국제 정세가 균열이 발생해 완전히 흩어지는 날 현대 인류가 필연적인 순환을 거부하고 선택적으로 평화만을 사랑하고 전쟁을 미워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조심스레 예견한다.


*번외*

[1: 인식론적 관점에서]

필자의 질문: 꿈의 세계(가상의 이상사회)의 모든 것이 이상적이고 바라는 형태로만 이루어지고 움직인다면 그들은 자율성이 결여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자율적인 존재이지만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자율성이 결여된 거죠.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규칙을 지키고, 같은 행동을 하는 통제된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지요.


자신이 자율적인 세상의 부품으로 타율적인 존재에 불과한 현실과 정반대로 세상이 자율적인 자신의 부품인 타율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면 저희는 ‘자신’이 타율적인 세상에 속한 존재로서 자율성을 상실했는지에 대해 합당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겁니다.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이 그저 세상의 실체를 인지했는지 못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트루먼이 자율적인 존재인지 타율적인 존 재인지로 나뉜다면, 타율적인 세상, 꿈의 세계(가상의 이상사회)에 속한 ‘자신’또한 타율적인 존재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2: 자유주의적 관점]

필자의 질문: 나루토 만화의 원작에서는 애니메이션판이랑 달리 무한 츠쿠요미 세계를 환술 세계로 자각하지 못하는 걸로 묘사되던데, 그렇다면 이들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다 겉으로만 자유롭고, 실질적으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속한 노예나 다를 바 없지 않을까요?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바이오쇼크 시리즈를 플레이했을 때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자 캐릭터인 앤드루 라이언의 대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선택하고 노예는 복종한다.”


이 대사가 글의 주제랑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저는 생각해요. 이 대사는 바이오쇼크의 주인공 잭이 자신에게 주입된 가짜 기억으로 인해 흑막 프랭크 폰테인의 의도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자신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모습을 앤드루 라이언이 반쯤 조롱하고 반쯤 설교하며 내뱉는 대사입니다.


앞선 주제에 앤드루 라이언의 관점을 적용한다면 환술에 걸린 본인이 스스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그 본질을 인식하느냐, 그리고 그다음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진정한 자유로움이 이루어지는지가 나뉜다고 볼 수 있다는 뜻이죠.


결국 배부른 가축으로 남느냐 배고픈 야생동물로 살아가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명제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앞서 말한 바이오쇼크의 앤드루 라이언 외에도 만화 진격의 거인 주인공 에렌 예거의 사상을 바라보면 저희는 상당히 재미있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이 둘은 모두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그것이 사회, 경제에서의 자유이든 인간의 권리 상의 자유이든)

만약 이들이 마다라의 무한 츠쿠요미 사상을 접하게 된다면 높은 확률로 엄청난 수준의 발작을 일으킬 거라고 플레이어와 독자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죠.


그 이유는 이들이 생물학적 욕구의 충족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더 무게를 두기 때문인데, 반대로 말하면 작중에서 에렌의 말대로 이 둘은 “인간은 ‘가축과 노예‘ 이상의 존재이며, 그렇기에 인간은 그들과는 같은 상황(타율적인 환경)에서 다른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둘은 모두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인간’보다 ‘권리‘, 즉 자유 자체를 더 중요시 여기는 듯합니다.


앤드루 라이언의 사상은 정부에 의한 구속을 극도로 혐오하고 경제, 사회의 자유가 자연히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극단적으로 엇나간 시장자유주의 혹은 스펜서주의에 가깝습니다. 대표적인 상징이 위대한 사슬이죠. 그러나 한번 자신의 이상사회가 엇나가기 시작하자 앤드루 라이언은 거리낌 없이 권력을 통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신념을 저버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에렌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기 위해 진격의 거인의 힘을 이용해 과거 계승자들의 자유의지를 박탈하고 더 나아가 인류 학살을 저지름으로써 자유지상주의를 추구함에도 스펜서의 ‘동등자유의 법칙’을 위배하고 있습니다.(동등자유의 법칙=말 그대로 모든 개인은 다른 개인의 동등한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법칙), 이 또한 스펜서주의를 극단화시키고 변형해 파시즘에 이른 현실사회와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둘은 왜 인간이 자유로워야 한다면서 인간의 목숨을 가벼이 여길까요? 그 이유는 이들이 내면에서 자유와 평등을 공존할 수 없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옵시다. 무한 츠쿠요미의 세상은 자율적인 개인과 타율적인 세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자유주의에 따르면 개인은 언제나 자율성을 구사해야 하며, 세상은 그 법칙상(경제 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 스펜서주의에서는 제1원인) 개인의 자유의지에 복속된 타율적 개념입니다. 복잡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요지는 무한 츠쿠요미의 세상과 자유지상주의가 추구하는 세상은 의외로 동일한 개념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앤드루 라이언의 이상사회 ‘랩처’는 처참하게 실패하였고, 스펜서주의는 종국에는 파시즘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에렌은 자유를 추구한 끝에 전쟁범죄자이자 자유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네요. 이렇듯 자유주의 이상사회란 매우 예민한 문제인 “개인의 권리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의 사소한 실패 하나만으로 손쉽게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한마디로 평등이 깨지면 자유주의 이상사회 또한 깨질 수밖에 없으며, 그 이유는 이들이 추구한 자유주의 이상사회는 실제로는 ’ 인간‘보다 ’ 자유‘를 상위 개념으로 보아, 자유에 인간이 종속된 존재로 전락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이 있죠.


“얘야, 인생이란 원래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란다. 그래서 인생이 재밌는 거 아니겠어? “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내뱉는 컬트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대사입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상당히 철학적인 질문이기도 하네요. ”예측불허“ 블록버스터 영화를 홍보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문구일 겁니다. 이 문구가 탬플릿처럼 쓰이는 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겁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겠죠.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아직 자유주의 이상사회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추신

이전에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용을 보강해서 올려봐요. 재탕이라고 욕하셔도 상관없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쓴 글입니다. 아무래도 시간차로 쓴 글이다 보니 어조나 흐름 등이 두서가 없어지는 경향이 있을 수 있는데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1편, 2편 이런 식으로 연재하기로 한 글은 후속으로 안 쓰고 문어발식으로 연재 중인데, 제가 준비하고 있는 소논문을 준비하는 밑거름으로 쓰려고 쓴 글들이라 크게 꾸준한 연재에 집착하지 않아서 생긴 일입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마구잡이 글쓰기는 줄이도록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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