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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두람이 Mar 22. 2022

여행의 힘 8

나무와 기차


 

본격적인 봄, 3월이면 초중고생의 등굣길은 경쾌하다. 매화꽃, 산수유꽃, 배꽃, 등 수많은 꽃봉오리가 꿈을 펼치듯 유치원생의 등에 멘 가방도 노랗게 설렌다. 유치원생의 가방들은 산수유나무에서 갓 핀 산수유꽃 같다. 아이들의 귀여운 걸음걸이를 보면 숨이 멎는 듯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이들의 말소리와 입김을 받아내는 골목과 건널목도 덩달아 신나고 밝은 표정이다. 이렇듯 봄은 아이들 걸음에서 가방을 멘 뒷모습에서도 꿈을 몰고 온다.      

  

기차소리는 멀게 느껴지지만 어느 때는 그리운 임이기도 하다. 나무들은 가깝게 느껴지지만 어떤 나무는 멀리서 나를 자극한다. 감정을 꾹 짜낸다. 두 아이를 유치원과 학교를 보내 놓고 홀로 커피를 마시는 날이면 강 건너 멀리를 바라보곤 했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25년도 지난 기억이다. 그 멀리에는 자주 기차가 지나다녔고 소나무와 미루나무들이 살고 있었다. 내가 베란다로 나가면 나를 위로하듯 나의 생각도 꺼내 읽었다. 봄이 되면 그 주변은 온통 하얀 꽃이 피어서 눈이 부셨다. 어떻게 해야 두 아이에게 많은 책을 사줄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나도 다시 직장에 나가야 하나? 한참 고민이 많을 때였다. 하얀 꽃들이 사라질 때면 나의 호주머니는 더 얇아졌다.       

       

그 멀리가 되고 싶어서 몇 년 전 강 건너로 이사를 했다. 매화나무가 많다는 매곡동으로. 이사를 와도 나의 호주머니는 여전히 가난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오래된 미루나무를 만났다. 나무의 수피를 만져보면서 나무의 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금세 파랑 하늘이 된 것처럼 마음이 넓어졌다. 그리고 내가 좋아한 기차도 지나다녀서 기뻤다. 이곳의 나무들은 기차소리를 먹고 살아가는 나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미루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다. 미루나무 밑동이 사정없이 구겨진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 구겨질 수가 있지? 태풍이 온 것도 아닌데 이 계절에 저럴 수가 있지? 100년 된 레일이 멈춰서 자신의 삶도 의무를 다했다는 것일까? 부모님을 보내드렸던 그때처럼 마음이 무척 아팠다.       


얼마 전에는 나 홀로 기찻길을 걸었다. 신천초등학교 앞에서 약수마을 앞까지 걸었다. 호계역이 폐역(1922.10.25 ~2021.12.27) 된 후 네 번째로 열심히 걸은 셈이다. 네 번째 걸었을 때는 레일도 없고 지지대도 없고 자갈만 남아 있었다. 다행히도 이 기찻길에는 양쪽으로 나무가 줄줄이 심어지고 울산 시민들이 편히 산책할 수 있는 숲길이 조성된다고 한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처음 기찻길을 걸었을 때는 마음 한쪽이 많이 허전했었다. 이젠 가까운 곳에서는 기차를 볼 수도 없고 기차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날 기찻길에서는 할머니와 아이도 만났다. 그리고 아저씨도 만나고 퇴근하는 청년도 만났었다. 저분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호계성당 앞까지 도착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런데 네 번째 기찻길 걷기는 많이 힘들었다. 자갈을 밟고 걸었기 때문이다. 호계성당 지나 솔밭공원을 지나면서 탱자나무도 만났다. 마치 내가 기차가 된 것처럼 ‘신천 자연마당’을 천천히 지나왔다. 쓰러진 나무는 조금씩 흙이 되어가고 있지만 남아있는 미루나무들은 나를 보며 웃어주는 것 같았다. 당당하고 꼿꼿한 허리로 사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공사가 멈춰진 옛 기찻길, 빠른 시일 내에 계획했던 대로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편안한 산책로로 어린 나무들의 꿈길로 조성되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요즘 나에게는 기차가 그리운 듯 멀고 나무가 더 가깝다.   



울산매일신문  2022. 3. 15.

http://m.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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