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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Apr 19. 2024

인턴 1

  지난여름 나는 두 달 동안 CCG의 르누아르 코리아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물론 인턴으로서. 처음에는 프로젝트의 목적이 이 주류회사의 갱생 전략을 짜주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진짜 목적은 구조조정에 대한 전략적 명분을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원고는 한국 지사의 듣보잡 미국대학 유학파 CEO 존 킴 (John Kim). 초면에 ‘전 좐 킴이라 합니다’라고 자기소개한다. 영어도, 한국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꼭 뒤늦게 어설프게 미국 물 먹은 사람들이 이렇게 되더라.. 그래서 대치동 학원가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유학은 조기유학이라고 강조하는 걸까. 그리고 아직 본인이 피고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측은 혀 꼬인 CEO를 아니꼽게 여기는 지방 영업팀. 그들은 80년대 한국 지사가 창립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저 단란주점 중심의 세일즈 방식만 고수하는 시대착오적 조직이었다. 자신들이 도마 위에 올려졌다는 걸 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인 고객은 두 달간 밤을 새워서 만든 CCG의 최종 보고서를 출근길 지하철에서 핸드폰으로 대충 훑어보고 말 쟝바티스트 (Jean-Baptiste)이다. 4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머리가 까진 파리 본사의 경영 전략 팀장. 어쩌면 그는 지하철이 덜컹거리는 바람에 보고서 이메일을 지워버릴 뻔했을지도 모른다. 뭐 나만의 상상이다.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나 알까. 다행히 겨울에 태양을 쫓아 한국의 아름다운 백사장을 만끽해 보겠다는 식의 개소리는 아직 안 했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이 동남아에 있는 줄 아는 유럽인이 많았다.


  나에게 떨어진 임무는 르누아르 코리아 영업사원들의 인사 채점표를 만드는 것. 이거 좀 ‘what the fuck?’ 아닌감. 나는 내가 수강한 과목들의 시간표도 겨우 외우는데 30-40명의 부가가치를 두 자리 숫자로 응축시킬 수 있는 채점표를 만들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대학생 인턴이 할 짓인지. 내 참..


  어느 금요일 밤. 팀이 배정된 CCG 써머 인턴들끼리 인근 바에 모였다. 인턴 6명 중 나, 도준, 효민은 연희대. 눈이 살짝 사시인 호석은 서울대였고, 제이콥은 하버드 유학파 (아직도 한국 이름은 모름), 그리고 똘똘이 막내 소희는 부산 공대 출신으로 유일한 이과계열이었다. 우리는 다들 서로에게 무슨 프로젝트를 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중 소희와 효민의 답이 인상적이었다.


  소희는 두 개의 건축 기계 회사의 합병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녀의 태스크는 양사 굴삭기 포트폴리오 통합.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밤을 새 가면서까지 해보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드레날린에 취해 굴삭기 모델명을 우리에게 읊어대며 중국 토질에는 업계 1위 일본 코마츠의 제품보다 한국 제품이 더 적합하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주장했다. 하지만 고가인 코마츠 굴삭기는 GPS가 장착되어 있어 분실을 우려하는 중국 시공업체들 사이에서 인기라고. 아니,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그러듯 차를 어디다 주차했는지 헷갈리는 것도 아닐 테고. GPS가 필요한가. 혹시 중국에서는 굴삭기 도난이 업계 최대 난제인가? 어쨌든 일본에서 굴삭기 부품 공급에 차질이 생겨서 올해는 한국 회사들이 중국 쪽 발주 물량을 싹 먹어치웠다고 한다. 뭐 어쨌든.


  효민은 우리 학교 신방과 출신인데,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생겼다. 필요 없는 수다는 제공하지 않고 말의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태도. 시크하다. 그리고 그녀가 입는 모든 옷은 블랙이었다. 그녀가 맡은 일은 을지은행 VIP에게 저축성 보험상품을 끼워 파는, 방카슈랑스 전략 모색이었다. 대한민국 은행 VIP 고객들의 자유입출금통장, 예금, 적금, 대출 미상환금 정보 등이 담긴 엑셀 파일을 회사 구석에 처박혀 데이터 분석하고 있단다.


  “최종열까지 숫자로 가득 찬 엑셀 파일이 궁금하면 한번 와서 봐봐. 모니터 두 개를 연결한 대형 화면으로 봐도 눈알이 빠질 것 같아. 파일 열 때마다 우울증 몰려오고 데이터 작업하고 저장할 때마다 심장이 떨려.. 혹시나 매크로 뻑떱나서 오류 나면 끝장이거든.”


  참고로 엑셀 마지막 열은 1,048,576였다. 안구 건조증으로 고생하던 그녀는 결국 인턴십을  때려치우고 치과 대학원에 편입했다. 평생 환자들의 구강만 보면서 살아야겠지만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컨설팅 회사의 신입 연봉은 9천만 원이다. 월 수령액은 복지수당 외에 세후 5백만 원 정도? 월 40만 원에 서울시 노원구에서 일산까지 과외하러 다니던 당시 대학생들에겐 엄청난 액수였다. 이 시절 대기업들의 신입 연봉도 3천만 원 대였으니 말 다했지. 하지만 평일에는 거의 자정까지 일하고 일요일 출근도 다반사였기 때문에 시급으로 계산하면 시간당 3천5백 원 정도 버는 꼴이었다. 사생활이 시베리아의 툰드라처럼 허허벌판이 되는 건 물론, 미래의 체력까지 당겨 쓴 바람에 매주 피로회복 주사를 맞아야 버티는 컨설턴트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SKY대 이상의 학력, 꿀리지 않는 집안, 해외경험을 통한 외국어 구사력 등을 보유한 선택받은 소수에 소속되어 있다는 자부심?을 누릴 수는 있다. 다시 말해 포장은 화려하나 내실은 부족. 포장이 중요하다면 이곳에. 내실이 중요하면 의대로 가는 것이 낫다. 게다가 의사와 달리, 이 업계의 수명은 짧다..


  나는 수포자에 가까웠으므로 어차피 의대는 불가. 젊을 때 빡세게 일해서 확 땡기고 빨리 은퇴해서 유유자적하고 싶을 뿐이다. 내 장래 희망은 그러니까 불어로 ‘플라뇌르 (flâneur; 시인 보들레르가 19세기 파리 문학 서클에서 유행시킨 단어)’- 한국어로 번역하면 한량-이다. 채도가 살짝 낮은 파스텔톤 캐시미어 가디건에 거대한 송아지 가죽 위켄드 가방을 들고 있는 남성 모델이 나오는 에르메스 (Hermès) 인쇄 광고의 카피다. 유럽 상류층 남자들의 인생 모토인 “Men don’t work. They pursue hobbies” (남자는 노동하지 않는다. 취미생활을 추구하지)와도 일맥상통한다. 일요일 아침에 원두커피 내린 후 드뷔시 레코드판 돌리며 정원에서 새싹 돋는 철쭉을 뭉게구름 모양으로 손질하는 플라뇌르. 내 히어로이다.


  어느덧 8월 말. 나는 영업사원 평가를 위한 설문지를 완성했다. 전 세계에 포진되어 있는 CCG 정리해고 전문가들의 노하우 덕분이었다. 하루 16시간씩을 근무하다 보니 같은 사무실을 쓰는 고참 두 명과 필요 이상으로 친해졌다. 한 명은 1:1 가르마로 노출된 떡진 두피를 손톱으로 긁고 손톱 냄새를 맡는 버릇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누가 옆에 있든 말든 핸드폰 거치대에 올려놓은 손거울을 보며 여드름을 짜 댔다. 누가 더 디스거스팅 했는지 모르겠다. 후자는 나에게 조언 같지도 않은 조언을 했다. 집안에 돈이 있으면 이런 곳에서 개고생 하지 말고. 차라리 자기처럼 미국 유학이나 가서 좀 놀다 오란다.


  “그럼 이준섭 님은 (직책 상관없이 님자 돌림이 이 회사 화법) 여기에서 왜 새벽 2시까지 일하세요?”


  “경력 쌓는 거지. 여기서 몇 년 버티면 아무 데나 갈 수 있거든.”


  그 대답처럼 이준섭 님은 딱 몇 년만 버티고 엑소더스라는 국내 사모 펀드로 얍삽하게 사라져 버렸다. 몇 년 후 펀드 쩐주(錢主)들이 원금 내놓으라고 난리치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명처럼 말이다. 떡진 두피맨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광화문 팔레스 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르누아르 코리아 이사진을 위한 최종 PT였다 (행사 비용은 1원까지 전부 고객에게 청구된다). CCG 로고가 베이지톤 연회장 벽면에 투사되고 있었다. 두피맨이 발표를 시작하자 첫 번째 PT 슬라이드의 mission statement (개요)가 등장했다.


  "저희는 르누아르 코리아가 주류업계의 루이비통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참고로 CCG의 모든 PT자료들은 컨설턴트들이 직접 만들지 않고, 자료 제작팀이 24시간 교대하며 작성해 준다. 그들은 슬라이드의 완성도를 위해 문맥, 뉘앙스, 발표자가 느끼고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오묘한 감정까지도 대변해 주는 이미지들을 인터넷이라는 우주에서 공수해 온다. 때로는 화려한 이펙트도 붙여준다. 컨설턴트들은 제작팀에게 손글씨로 갈긴 지시사항을 몇 장을 던져줄 뿐이지만 말이다. 고객사 현장 근무 시에는 팩스로 지시한다. 새벽에 팩스가 오작동되기라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와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쨌든 ‘루이비통’이라는 수풀림 고딕체 네 글자 옆에는 브라운 계통의 기저귀 가방 사진 하나가 중간에 떡하니 공존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담아도 넘치지 않아 아기 엄마들이 선호한다는 그 가방 사진을 보니 호텔 연회실이 갑자기 지방 도시 공항 면세점이 된 것 같았다. 아니, 에르메스, 샤넬, 머릿속까지 있어보이겠금 만들어주는 벨기에의 델보 (Delvaux)를 놔두고 루이비통이 르누아르의 지향점이라고? 결론은 정리해고인데 뭔 고상을 떨고 있냐고. 한강 이남 지역의 세속적인 분위기에 덜 찌든 두피맨에게는 루이비통 네버풀 (Neverfull)이 최애였나 보다. 제작팀 언니들은 비웃었겠지. 급하게 셀렉한 가방 사진이 구리다고 할까 봐 염려했는데 컴플레인 안 들어왔다고. 그 순간이었다. 두피맨이 발표하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두피맨의 얼굴이 일그러진 듯, 했다. 내 표정이 꽤나 냉소적이었나 보다.


  결국 여름 인턴쉽은 지나갔고, 약속대로 9월 12일 오전 10시에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손세진 님, CCG 서울 인사팀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안녕하세요. 개강하니 다시 학생 된 게 실감 나네요.."


  “아시다시피 서머 인턴십 이후 풀타임 오퍼에 대한 결과 알려드리려고 전화드렸어요. 안타깝게도 세진 씨는 오퍼를 못 받았습니다.”


  “네, 기대는 안 하고 있었어요. 혹시 저에 대한 전반적인 피드백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냥.. 좀 시니컬하고, 맡겨진 업무를  많이 어려워했다는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했다. ‘분명히 두피맨이다.’  밤샘을 하면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인사팀까지 전달될지는 몰랐다. 두 달에 걸친 한국 사회생활의 교훈은 이거다. 불평하지 말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일해야 한다는 것..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종각역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양복 속의 땀이 마르기도 전에 발신자 표시 제한 전화가 걸려왔다. 류 차장님이었다. 취리히 증권 채권발행팀 실무자. 그녀는 슈퍼 엘리트다. 알고 보니 회계사 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한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 엑셀을 피아노 치듯 다루는 사람이랄까. 그녀는 홍콩 아시아 본부에서도 일 잘하기로 소문난 나의 우상이었다. 옷도 항상 세련되게 잘 차려입고 출근했다. 해외 증권사에 다니는 여자들의 유니폼 같은 판에 박힌 화이트 셔츠에 펜슬 스커트가 아니라 올드머니룩의 표본인 아크리스 (Akris, 고품격 관능미를 추구하는 로고 딱지 하나 없는 스위스 명품 브랜드)에서나 팔 법한 프린트 블라우스와 헬무트 랭 (Helmut Lang)의 시그니처 블랙 롱팬츠. 어쨌든 류 차장님의 선택과 감각은 확실히 압구정동에서 복제된 그녀들과는 달랐다.


  “세진 씨 축하드려요. 세진 씨로 최종 결정됐어요. 당장 올 수 있어요?”


  아싸, 취리히 증권 인턴십 합격! 그런데 내 인터뷰에는 치명적인 거짓말 하나가 숨어있었다. 휴학생이기는커녕, 가장 빡센 마지막 학기 재학 중인 학생이라는 사실. 내일 아침에 제출해야 되는 과제도 빨리 짜집기 해야 되는데. 어쩌지. 양심에 찔렸지만,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지상최대의 목표인 투자은행 취업을 위해서는 이 인턴십을 해야 한다. 목표 중심적인 인간. 바로 나다.


  “지금 올 수 있지?” 그녀의 마지막 말이 어느새 반말로 바뀌었다.


  이건 질문이 아니고 당연한 오퍼 수락을 전제로 한 명령이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 반. 나는 희소식을 뒤로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종각역에서 취리히 증권이 있는 세종타워로 되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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