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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Apr 23. 2024

[언어라이브드] K-게이 런던 뱅커 성장기: 인턴 2

  취리히 증권 인턴십 동안의 나의 공식적인 동선은 세 개의 꼭짓점으로 귀결된다. 세종타워, 한일관 그리고 킹코스 인쇄소. 하지만 실제로는 사각형의 동선이었다. 졸업 학점을 메꾸어주는 연희대 국제학부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대신 수업은 최대한 이른 아침과 저녁에 가까운 시간으로 몰아놨다.


  아침 9 시반에 "어디 있니?" 하고 류 차장님의 전화가 걸려오면 킹코스에서 프린트물을 감리하고 있다고 둘러댔다. 4페이지의 그래프가 차장님이 의도하시는 블루톤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직원과 상의해서 다시 출력해 보겠다는 식의 핑계를 댔다. 셀 수 없이 많은 PT 자료를 밤낮으로 인쇄했기 때문에 차장님은 믿어주셨다. 그리고 회사로 들어가기 직전 킹코스에 들려 전날 밤에 픽업했어야 할 종이 뭉치를 들고 와 바인딩 기계 옆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바인딩 기계는 회사에서 나보다 훨씬 존재감이 컸다. PT 자료가 시니어들의 지시 하에 수시로 수정되었기 때문에 발표 당일 몇 시간 전에 사내에서 직접 바인딩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채권 발행팀은 옆 M&A (기업인수·합병) 팀과 함께 바인딩 기계를 공유했다. 취리히 증권 서울 지점의 유일한 바인딩 기계. 그런데 내가 인턴쉽 첫날, 바로 망가뜨려 버렸다. 너무 많은 양의 종이를 끼워 넣어 바인딩 기계가 고장 나고 만 것이다. 그렇다. 여러 번 바인딩하기 귀찮아 한번에 많이 집어 처넣었다.. 시간은 자정쯤이었고 A/S 센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내일 아침에 고치면 되겠지 하고 퇴근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9시 M&A팀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 금융 역사상 최대의 은행 매각 딜. 취리히 증권은 최종 매각 자문사 선발 전 마지막 발표를 앞두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발표 전날 내가 바인딩 기계를 박살 낸 것이다. 다행히 그쪽 팀 주니어로 뽑힌 스테판이 킹코스가 문을 열자마자 달려가 PT 자료를 바인딩했고, 취리히 증권은 아슬아슬하게 매각 자문사로 선발되었다. 덕분에 나는 인턴십 기간 내내 M&A팀 이사들로부터 갈굼을 당했다. 어쩌면 지나치게 성실한 스테판과 더 비교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인턴, 그는 정직원으로 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열이 올라왔다.



  

  오늘은 취리히 증권 홍콩 아시아 지역 오피스에서 피어스 전무가 오기로 한 날이다. 피어스는 내 인턴 자리를 풀타임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권 이사님과 류 차장님은 이 날 신경 좀 쓰고 피어스에게 잘 보이라고 했다. 인턴십 중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을 거라고.


  피어스는 런던 근교 고급 주택가 Surrey 출신이었다. 런더너들은 아기자기한 동산이 파도치는 이 녹색지대를 브로커벨트라 부른다. 많이들 시티에서 투자은행 브로커로 일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좌천돼 홍콩에 굴러 떨어진 줄은 모르겠지만.. 그는 FILTH (Failed in London, Try Hong Kong; 런던 실패, 홍콩에서 재도전) 부류의 산 증인이자, 멸종이 임박한 최후의 세대였다. 90년대 런던 금융계에서는 승진 루트에서 꼬여버린 직원들을 정리해고 하기보다 홍콩으로 유배했다. 말이 유배지, 무료 주택 제공, 아이들 교육비 지원 등 상상을 초월하는 혜택으로 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거기에 말도 안 되게 낮은 홍콩의 15% 소득세 축복까지 누리며. 나중에는 브렉시트 때문에 런던이 맛이 가고 미국 취업 비자받기도 까다로워지면서 홍콩이 영국인 뱅커들 사이에서 새로운 약속의 땅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물론 무료 주택 그 딴 건 사라져 버린다.


  피어스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50대 초반 백인 남성. 사진과 똑같은 흰색 줄무늬 패턴의 네이비 수트에 홍조증 걸린 피부톤과 유사한 핑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멀리서 얼핏 보면 파격적인 노셔츠 같았다. 네이비 수트의 줄무늬가 두껍고 간격이 좀 넓어서 실제보다 더 뚱뚱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제1차 대전에 참전한 영국군을 기리는 빨강 종이 양귀비를 자켓 버튼홀에 달고 있었다. K-양복 힙합 핏과는 결이 다른 다소 고리타분하지만 클래식한 룩이었다.


  "Hi Pearce. I’m Saejin. Finally good to see you in person. It feels like meeting a radio star after hearing you speak on all those conference calls."

  (안녕하세요 피어스. 세진입니다. 드디어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마치 수많은 컨콜에 등장한 라디오 스타를 만나는 기분이네요.)


  "Andrew’s told me about you. Pleasure’s mine. So what’s the verdict? D’you think I’m video material?"

  (앤드류 통해서 세진 이야기 들었네. 만나서 반가워. 평결이 어때? 텔레비전에도 진출할 수 있는 외모인가?)


  경쾌히 시작된 대화가 삐걱거림 징조를 보였다. 권 이사님은 피어스 뒤에서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Oh, I’m sure they can work something out.."

  (뭐, 손 좀 써보면 되지 않을까요..)


  본의 아니게 초면상 예의에 어긋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이 군대조직에서 직급 자체가 아예 없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이메일 주소일 뿐이고 피어스는 20년 동안 몸을 바친 전무, 아니 시니어 전무였는데 말이다. 그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Right. How’s that weekly update report coming along?"

  (하여튼. 주간 업데이트 리포트 작성은 마쳤나?)


  권 이사님이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더니 곧 있을 대한 전력 미팅의 메인 포인트를 피어스에게 브리핑해 줬다. 나는 구석에 있는 내 데스크로 재빨리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피어스가 홍콩으로 떠나기 전에 내 실수를 어떻게 만회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류 차장님이 책상 아래에서 블랙 프라다 구두를 벗으며 말했다. 그녀의 발톱은 빨간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세진, 오늘 피어스가 좋아하는 갈비탕 포장 어때? 스케줄 보니까 대한전력 미팅 끝나고 도로 사무실 올 것 같은데. 내 법카갖고 한일관 가서 한번 긁어봐."


  "주간 리포트 끝내고 갔다 올게요." 나는 그녀가 건넨 아멕스카드를 받았다.


  사각형의 플라스틱 용기에 포장된 갈비탕, 밥, 수육, 해물전, 서비스 김치 반 포기를 들고 종각역 지하보도를 오르내렸다. 손에 든 비닐봉지 안에서는 2 리터 상당의 갈비탕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방출하지 못한 채 출렁이고 있었다.


  "Pearce, here’s the one with extra meat."

  (피어스, 고기 추가한 갈비탕은 이거예요.)


  갈비탕, 밥, 젓가락, 숟가락 그리고 낱개 포크하나를 세팅하고, 나머지 음식은 나눠 먹기 편하게 테이블 중앙에 정갈하게 놓았다.


  "Wow, Andrew. This is the first time an intern has brought back a fork for me. Unbelievable."

  (와우, 앤드류. 인턴이 나를 위한 포크를 챙겨 온 건 처음인걸. 경이롭네.)


  내 선입견이었지만 피어스는 홍콩 현지 먹거리를 외면한 채, 삼시세끼 스테이크만 썰 것 같은 서양인처럼 보였다. 젓가락질은 물론 서툴렀을 거고. 그가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말했다.


  "Well done, mate."

  (수고했어.)


  "No worries."

  (아니, 뭘요.)


  나는 쿨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오후 3 시반 홍콩발 케세이퍼시픽 편을 타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떠났다. 나는 과연 어필에 성공한 걸까. 포크 하나로 내 능력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왠지 이곳에서의 인턴십은 갈비탕 배달만 하다가 끝날 것 같았다. 낙담하고 있던 그때 류 차장님이 말을 걸었다.


  “세진, 한잔 할래?”


  우리는 그녀가 자주 간다는 취리히 증권 근처 레드와인 전문바로 갔다. 사실 레드와인을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인턴나부랭이가 취향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소르본대를 나온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프랑스식 가정요리에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크지 않은 곳이었지만 확실히 프렌치스러웠다. 잠시 서울에서 몽마르트로 자리를 옮긴 것 같았다. 류 차장님의 세련된 취향에 어울리는 곳이었달까.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성적인 호감은 절대 아니었다. 한 세 잔 정도 마셨을까. 그녀는 어느새  취기가 올라온 듯 얼굴이 붉어졌다. 어랍쇼. 생각보다 술이 약한가.


  “세진, 여자 친구 있어? 당연히 있겠지? 세진 씨 정도면.. 키도 크고, 영어는 네이티브고, 연희대 경영학과에 그 정도 얼굴이면 준수하지.."


  일 얘기나 하면서 조언? 몇 마디 던질 줄 알았던 술자리에서 뚱딴지 같이 연애 이야기가 왜 등장? 좀 당황했다.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상관이고, 피어스에게 나를 한번 더 어필해 줄 수 있는 그녀다. 여자친구는 없었지만 왠지 있다고 방어하고 싶었다. 쓸데없이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하면 더 곤란하니까.


  “음.. 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에요.”


  “아 언오피셜 걸프렌드가 있는 거구나..”


  “아, 지금은 뭔가 취업에 더 집중해야 할 시기 같아서요. 좀 멀리 있어요.”


  “롱디스턴스? 그래.. 난 롱디 힘들던데. 가까이에 있는 게 좋지 않나, 의지하고 싶을 때 옆에 있어야지.”

  

  ‘누나.. 왜 이러세요?’


  분위기를  왜 이쪽으로 끌고 가지? 이래서 그동안 나의 킨코스 둘러대기를 봐주었던 건가.. 뭐 어쨌든 나의 애인은 먼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멀리 있다는 정도로 말해두었다. 다만 걸이 아니라 맨이겠지.. 잠시 침묵. 그녀는 훅 다가와 내 보라색 양모 소재 넥타이를 만지더니 살며시 뒤집어 봤다. 손등이 내 가슴을 여러 번 스쳐 지나갔다. 여친에게 신경 써주라더니 왜 남의 넥타이를 만지락거리는 거지?


  “오~Drake’s? 이거 무슨 브랜드야..”


  그리고 그녀는 취했는지 머리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Drake’s를 모르다니 실망인걸. Drake’s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국 넥타이와 스카프 전문 브랜드이다. 적당히 고급스럽고 적당히 유머스럽다. 영국 남성복 세계 특유의 위트가 묻어난 라벨이다. 프랑스 브랜드처럼 고귀함을 떨지도 않고 허리라인 파 들어간 이태리 브랜드처럼 삐끼스럽지도 않다. 지난해 런던 놀러 갔을 때 새빌로우 (Savile Row) 본점에서 구매했다. 그래 나는 이런 브랜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일하고 싶었다.


  테이블 밑에서 서로의 구두가 계속 스치며 부딪혔다. 재빠르게 먼저 발을 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어느새 류 차장님의 발목이 내 복숭아뼈에 맞닿아 있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섹시한 편이다. 하지만 난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수지한테 당장 전화해 달라고 문자를 보낼까? 친구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일어나야 할 것 같다며 퇴장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녀를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업계에서 유명한 능력자니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류 차장님은 잘 생겼다. 날카로운 턱선과 쌍꺼풀 없는 눈이 매력적이었다. 오빠가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녀의 대시를 받아주면서 투자은행 정직원이 되는 길을 선택해 볼까 고민했다.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아무리 내가 절박해도 그렇지..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그냥 커밍아웃해 버리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샤넬의 전후 이미지를 쇄신하고 부활시킨 1933년생 칼 라거펠트 (Karl Lagerfeld)의 커밍아웃 스토리가 생각났다. 그가 용기 내어 자신의 어머니한테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고백했단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고, “누구는 빨간색을  좋아하고 누구는 파랑색을 좋아한단다. 그냥 취향의 차이야.”


  때마침 우리 테이블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Bonsoir, I’m François. Enchanté.”

  (안녕하세요. 프랑수아입니다. 반갑습니다.)


  이 와인바의 주인 프랑수아였다. 류 차장님과 프랑수아는 이미 꽤 친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류 차장님과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프렌치스러운 노골적인 눈빛. 어제 입고된 98년 산 보르도 생테밀리옹 (Saint-Émilion) 좋다며, 꽤 비싸 보이는 와인을 계속 서비스로 따라주었다. 와인 때문인지 그의 눈빛 때문인지 내 얼굴이 자꾸 붉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넥타이는 어느새 느슨히 풀려 있었다.


  류 차장님은 카운터 위에 엎드려 잠들었고, 나는 취리히 증권에서 제공하는 콜택시에 그녀를  태워 보냈다. 그리고 프랑수아와 2차로 이태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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