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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Apr 30. 2024

[언어라이브드] K-게이 런던 뱅커 성장기: 담배

  임페리얼 오일의 합격 소식을 접한 그 주에는 여러 취업 인터뷰가 몰려 있었다. 여러 곳에 면접을 볼수록 원하는 회사에 합격할 확률이 높으니 최대한 많은 곳에 지원하라고 한 선배들의 조언을 따른 결과였다. 모의고사 같은 것인가.. 인턴을 하면서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 졸업 학점도 따야 하는 상황, 한국식 표현으로 말해보자면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이’ 바빴다. 아무래도  히스테리컬하면서 시니컬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다음 인터뷰도 근대적인 영국계 회사였다. 잉글리시 타바코.  <Thank You for Smoking>이란 미국 영화를 떠올리며 지원서를 썼다. 담배, 제약, 무기, 석유업계 로비이스트들이 격주 금요일 점심시간에 모여 자신들의 커리어 고충을 털어놓으며 서로를 위안하는 씬이 인상적이었던 영화..


  잉글리시 타바코는 강남 스타빌딩의 펜트하우스를 쓰고 있었다. 이 건물이 신축됐을 때 이 꼭대기 층에서 레이브 파티가 크게 열렸다. 파리 출신의 유명 디제이가 내한해 리셉션 데스크가 있는 이 자리에서 레코드판을 돌려 댔고, 나는 열심히 허리를 회전하며 파티에 온 남자들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나의 절친 수지는 DJ 활동명이 은하수인 연희대 오빠를 만나 저기 통로 쪽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지.. 입장료가 비싸 오기를 망설였던 수지에게 내가 받은 초대권을 내밀었을 때 격하게 기뻐하던 얼굴도 떠오른다. 그날 정말 재미있었는데..


  바로 그 통로에서 인사 담당자로 보이는 여자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색 실크 블라우스에 방콕 야시장에서 건진 듯한 얼룩말 무늬 숏 스커트. 대기업에서는 엄두도 못 내는 패션이었다. 거의 코스튬이었다.


  “안녕하세요 손세진 씨. 와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눈을 맞추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었다. 상당히 흘리는 타입.


  “마크 에스퀴스 재무팀 이사님과 인터뷰하실 거예요. 이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마크는 영국 왕실에 잼과 홍차를 납품하는 포트넘 앤 메이슨 (Fortnum and Mason)의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쇼핑하다 길거리로 튕겨 나왔을 것 같은 전형적인 잉글리시 상류층처럼 생겼다.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가문 휘장이 새겨진 금반지만 안 꼈을 뿐이지 (사실 누구나 영국 동네 금은방에서 이 반지를 맞출 수 있다). 그러나 골방에 처박혀 숫자만 돌렸는지 얼굴이 창백했다. 그가 일어나 내쪽으로 걸어왔다. 비쩍 마른 몸. 키는 188센티미터 정도로 보였다. 나이는 40 대 초반 정도일 것 같았다. 그러나 길쭉한 몸에 비해 두상이 너무 크고 푸른색 와이셔츠 목둘레가 조여 보여 마치 걸어 다니는 블루베리맛 츄파츕스 같았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스페인 다국적 기업 츄파츕스.. 마크는 손을 내밀었다.


  “Hi Saejin, how do you do?”

  (안녕하세요 세진. 처음 뵙게 됩니다.)


  상류층 맞다. 그들은 절대 ‘nice to meet you’ 같은 상스러운 미국식 표현 안 쓴다.

  

“Hello Mark. I’m very well. Thank you for asking. I appreciate your time.”

  (안녕하세요 마크. 안부 문의 감사합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The privilege is mine. Please take a seat.”

  (세진을 만나게 되어 저야말로 황송합니다. 이리 앉으세요.)


  자리에 앉았다. 나와 마크 사이의 책상 위에는 재떨이가 있었다. 젖은 엠보싱 냅킨이 깔려있었다. 탬버린만 있으면 이거 완전 노래방인데.. 나는 놀라서 마크에게 물었다. 사내에서 흡연이 가능하냐고. 그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담배는 피우냐고 되물었다.


  “Of course not..”

  (당연히 안 피죠..)


  ‘Not’을 너무 강조한 것이 민망해서  쌍볼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크는 잉글리시 타바코는 흡연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중얼거리면서 화제를 바꾸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나는 잡다한 질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인터뷰하는 건지..


  마크는 최근까지 홍콩에 있는 로스차일드 은행 아시아 본부에서 M&A 자문 일을 하다가 이쪽으로 스카우트됐다고 한다. 한국 흡연 시장이 아직도 성장세이고 수입담배 시장 점유율도 오를 여지가 많이 남아 있어 첫 근무지로 서울을 포스팅했다고. “Our family love the food!..” 그런데 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아이스브레이킹은 끝났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Mark, so how much money does English Tobacco make in Korea each day?”

  (마크, 잉글리시 타바코의 한국 하루매출이 얼마예요?)


  “Five million dollars. Just in cash.”

  (5백만 불이요. 현금으로만.)


  놀랐다. 50억 원어치 현금을 이 땅에서 매일 쓸어가다니.


  “And what do you do with that?”

  (이 돈을 어떻게 활용하나요?)


  “We buy Korean government bonds and hedge our currency risk.”

  (한국 국채를 사들이고 외환 리스크 헷징을 합니다.)


  이건 양담배 회사가 아니라 소규모 종금사였다. 회사에 대한 관심을 내비칠 겸, 개인적인 궁금증도 풀 겸,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부터 대화가 꼬이기 시작했다.


  “May I ask.. what is English Tobacco doing to encourage smoking in Korea?”

  (무례한 질문일 수 있겠으나.. 흡연을 권장하기 위해 잉글리시 타바코는 어떠한 국내 판촉 활동을 벌입니까?)


  “Our main objective is to win market share..”

  (저희의 주목적은 시장 점유율 늘리기입니다.)


  “But what happens if your market share rises to 100%? Theoretically?”

  (그런데 이론적으로 시장 점유율이 100%에 도달하면 어쩔 건가요?)


  “I don’t see where you’re getting at. Can you elaborate?”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네요. 부연 설명 해줄래요?)


  “Shouldn’t you be trying to grow the pie instead of taking market share away from domestic competitors?”

  (국내 담배 제조업체로부터 점유율을 뺏기보다 잠재적 흡연 시장을 키우는 게 더 시급하지 않나요?)


  환기가 안 되는 마크의 오피스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졸업도 안 한 학생으로부터 흡연 시장의 파이를 키울 전략은 안 세우냐는 질문을 받을 줄 몰랐던 걸까.


  “That’s a good point!”라며 마크는 대화를 종료시키고 나에게 자신 명함을 건넸다. 추가 질문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속 뜻은  ‘바쁘니까 이제 좀 꺼져줄래?’ 일 것이다. 그는 나를 리셉션 데스크로 안내해 줬다. 나는 “thank you for your time”라 말하며 자동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졸업 학기를 잘 마치라고 충고해 주고 통로로 사라졌다. 그리고 아까 안내해 준 얼룩말 무늬의 그녀가 배웅하며 내 손에 양담배 두 갑을 건네주었다.


  “고생했어요~ 우리 회사에서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이에요.”


  괜찮다고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말하고 싶었지만 피곤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담배를 버리려고 하는데 담뱃갑 사이에 끼어있던 그녀의 명함이 툭 떨어졌다. 이건 또 무슨 뜻이지 싶었다. 이틀 뒤 잉글리시 타바코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퍼를 받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해외기업의 면접에서는 외교관이셨던 부모님을 따라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았던 경험이 확실히 작용하는 것 같았다. 사실 한국에서 살았던 날보다 해외에서 산 날이 두 배가 넘는다. 대화를 할 때도 영어가 편하다. 영어로 먼저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번역된 한국말을 내놓는 정도랄까. 영어는 그냥 살면서 자연스럽게 익혔을 뿐, 특별한 스킬이라고 생각지 않았는데 취업 시장의 낚시꾼들은 내 북미 본토 발음에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여러 명이 같이 인터뷰를 볼 때에는 더더욱 유리했다. 다 같이 영어로 답변을 해도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으로 답하는 게 더 스마트해 보이니까. 왜, 하버드 과수석한 외국인이 한국말을 할 때 발음이 어눌하면 어눌하게 보이지 않나.


  그러나 잉글리시 타바코의 오퍼를 받고 나니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이곳이 아니라는 것을. 취업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곳저곳 면접을 보았지만, 쫓기듯 취업할 순 없다. 물론 잉글리시 타바코는 좋은 회사고 오퍼가 온 것에도 감사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담배를 한 개비도 피워본 적 없는 내가 이 산업에 무슨 매력을 느끼겠는가. 그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투자은행 채용을 더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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