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기와거울 May 03. 2024

P사 1

  낙엽이 한두 개씩 떨어지는 계절이 왔다. 연희대를 조용히 지키는 무악산도 어느새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백양로 한가운데 서서 본관 뒤로 보이는 무악산을 감상하다가 발 밑에 깔린 잔디에 눈이 갔다. 축제 때가 되면 백양로는 간이 주막들로 가득 찬다. 그런데 국문과 주막에서 전을 굽다가 부추가 떨어져서 이 잔디로 부추를 대신했단다. 그런데 다들 취해 있어서 맛있게만 먹었다는. 국문과를 졸업한 수지가 해준 이야기다.


  그녀의 전공이어서인지 수지의 말투는 항상 또박또박하고 명료했다. 그렇지만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뒤틀린다거나 제한적인 어휘를 무한조합해 사용하는 내 서툰 한국말을 별 저지먼트 없이 받아주었다. 수지는 한국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문장은 그냥 영어로 말하라고 했다. 토론토보다 저렴한 위니페그로 어학연수 가려고 악착같이 과외하고 모으고 있는데 떠나기 전에 귀나 좀 트이게 도와달라며.


  오늘은 수지가 오랜만에 학교에 들른다고 했다. 회사 창립기념일이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학교 도서관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남친을 만나러 온 거라는 걸. 그가 몇 년째 시험에 떨어지길 반복하고 있어서, 수지는 직장인이 되었음에도 신촌 근처에서만 대학생처럼 데이트를 하고 있다. 그것도 한 달에 한 번?  


  우리는 같이 캠퍼스를  산책하다 사회과학대 지하 매점에 들렀다. 냉장고에서 리뉴얼된 ‘갈아 만든 배’ 캔 두 개를 집고 계산대로 향하며 내가 말했다.


  “역시 한국 사람은 한국 배가 적격이지. 토정비결.”


  “너 무슨 말하는 거야?”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재배된 농산물을 먹는 게 좋잖아.”


  수지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너그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진아. 그건 토정비결이 아니라 신토불이라고 하는 거야.”


  “아, 맞다.”


  계산대에 있던 아주머니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찰지게 짝짝 씹던 껌의 소리도 사라져 버렸다.


  “야, 너 방학 때 그만 싸돌아 다니고 한국어 어학당이나 좀 끊어. 토정비결은 완전 개쪽팔린다.”


  수지는 웬만하면 상욕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좀 억울했다. 내 출국은 레저라기보다는 칠레에 계신 부모님을 보기 위한 가족 방문이 주목적이었다. 귀국길에 항상 상파울루에서 3박 정도 묵으면서 밤샘 클러빙으로 입안에 혓바늘이 돋은 채 김포공항에 내렸지만.. 비행기 뒷바퀴가 서울의 아스팔트를 때리는 순간 ‘아휴, 개피곤해.. 방학이 부족해’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우리는 은행나무가 양옆으로 나란히 줄을 선 길을 걷고 있었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지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무심히 밟으며 걸었다. 이제 취업을 하면 이 길을 걸을 일도 거의 없겠지.


  “취업은 어떻게 되고 있어?”


  “계속 면접 보고 그러고 있지, 그래도  두 군데 붙었어. 석유회사랑 담배회사.”


  “담배회사? 오~ 너 거기 다니면 나 양담배 무한 제공해 줘라.”


  “뭐, 그거야 쉽겠지. 근데 모르겠어. 여기로 가야 할지. 막상 기다리는 곳에서는 소식 깜깜이네..”


  식민지 착취 st. 근대 기업으로부터 풀타임 오퍼 두 개를 받아놓은 상황이었지만, 둘 다 마음에 차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담배를 빨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기에, 만약 내가 흡연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면 은근 자랑거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찌 되었건 두 개의 정규직 자리니, 자존심은 지킬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가고 싶은 외국계 투자 은행들은 왜 가뭄에 콩 나 듯이 인력을 뽑는 걸까. 뭐, 그곳들은 정규 리크루팅이 없을뿐더러 헤드헌터들을 통해서만 공석이 알려지기에, 내가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유일하게 지원한 투자 은행은 Deutscher Kredit이었다. 합격하면 여름에 런던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고 서울 사무소로 배치되는 Global Markets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내내 <수학의 정석> 표지에 런던 사진을 붙이고 다닐 정도로 런던은 나에겐 꿈에 도시였기에 너무나 합격하고 싶었다. 그러나 서류 통과조차 연락받지 못한 상황이라 불안했다.


  수지와 헤어지고, 나는 홀로 학관에 들어가 노트북을 열었다. 불안한 마음에 경영학과 주식투자 동아리 게시판에 들어가 보았다. 때마침 Pierpoint 투자은행 서울 사무소에서 리서치 어시스턴트(RA)를 찾는다는 공지가 떠 있었다. 공지를 올린 사람은 동아리 창립 멤버인 우식 선배였다. 이름으로만 들어본 그는 현재 Pierpoint에서 한국 은행 섹터를 담당하고 있었다. RA란 온갖 투자 관련 정보를 캐내고 기업들이 던져주는 각양각색의 수치와 도표를 애널리스트들이 빨리 소화할 수 있도록 정리해 주는 시다바리역이다. 몇 년 만 버티면 주니어 애널리스트로 승격돼 비인기 섹터의 잡주 서너 개 정도 커버리지를 개시하게 된다. 안구건조증으로 CCG 인턴십을 중도 하차한 효민이가 생각났다. 숫자에 찌든 엑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수천 개의 그래프를 그릴 생각을 하니 지원하고 싶은 열정이 빠르게 식었다. 그렇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이력서를 보냈다. 이력서를 보니 네덜란드에 교환학생을 갔을 때 만난 룸메이트, 비욘이 생각났다. 비욘은  친절하게도 나의 보잘것없는 이력서를 대폭 수정해 주고 투자은행 지원 시 상시 요구되는 모범 답안까지 공유해 준 친구다.


  투자 은행을 지원하게 된 데에는 그의 영향이 컸다. 그는 스톡홀름 경제대 (SSE)에 재학 중인 엘리트로, 그곳은 런던정경대 (LSE), 스위스 생갈렌대 (University of St. Gallen)과 함께 유럽에서 재무 교과가 빡세기로 유명한 3개 대학 중 하나였다. 그는 투자은행에 들어가면 일단 초봉이 1억- 게다가  공짜택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할 수 있는 법인카드 제공, 비즈니스 클래스와 오성급 호텔을 수반한 잦은 해외출장 등 일반 회사원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다고 했다. 1억부터 시작? 비욘의 말에, 말 그대로 나는 세속적으로 끌렸다. 그는 이미 골드만삭스 런던 사무소 M&A팀의 주니어로 입사하는 것이 확정된 상태였다.


  공부 외에도 비욘과 나는 기숙사에서 수시로 열리는 파티를 같이 활보했다. 그때마다 그의 로봇 댄스를 질리게 봐야 했지만.. 리옹에서 온 초록색 눈의 오렐리와 자고 싶다면 그 춤은 안 된다고 수 없이 말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말에 그의 고향을 방문해서 가족을 만난 기억도 있다.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 아버지는 스웨덴 공군 파일럿의 훈련 담당자였다. 아버님의 취미가 글라이더 묘기 부리기여서 같이 스웨덴 시골 창공을 빙빙 돈 기억도 난다. 비욘도 스웨덴에서 나처럼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세진, 너 요즘 인터뷰 안 보냐? 왜 이렇게 한가한 거야?”


  권 이사님이 시비를 걸었다. 이 정도는 머리를 맞대고 일한 지 두 달이 넘었기 때문에 전혀 거슬리게 들리지 않았다. 한가한 이유는 몇 개 과목이 이미 종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한신은행 달러 채권 발행 제안서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네, 지원한 곳에서 아직 연락이 안 와서요..”


  “그럼 임페리얼 오일이네. 내 나이지리아 꼴찌 동창 연락처 줄까? 너 잘 봐달라고 부탁해 줄게.”


  ‘잘 봐 달라고? 여기 정직원 오퍼나 주지.. 참나.’


  “이사님, 잠깐만요.. 전화가 와서..”


  짜증이 나려는 찰나에 발신자 제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 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마침 류 차장님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그녀는 찡긋 윙크를 하며 입모양으로 ‘잘해봐’라고 말했다. 지난번 와인바 술자리 이후 어색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친근함을 과시하고 있다. 취한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곱게 집에 보낸 젠틀맨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 여전히 옷매무새는 고급지다.


  “안녕하세요 손세진 씨, 저 김우식입니다. 동아리 선배인데 학번 차이가 많이 나서 아마 모를 거예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선배님 Pierpoint에 계시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네. 지원서 잘 받아봤어요. 인터뷰하러 왔음 좋겠는데. 혹시 오늘 저녁에 올 수 있어요?”


  마음은 이미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정동 돌담길에 살포시 둘러 쌓여있는 Pierpoint 투자은행 서울 사옥.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4시였다.


  “네, 괜찮습니다. 지금도 갈 수 있어요. 종각역 근처입니다.”


  “그럼 5시까지 저희 사무실로 와서 리셉션에서 전화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화장실로 갔다. 건조한 실내공기 탓에 푸석해진 머리를 살짝 물로 적셨다. 드디어 투자은행 정규직 인터뷰구나.




#노벨라 #comingofage #취업 #해외취업 #영국취업 #런던취업 #런던직장인 #런던투자은행 #런던금융 #런던은행 #국제금융 #더시티 #thecity #헤지펀드 #파생상품 #골드만삭스 #투자은행 #investmentbanking #LGBT #게이 #게이이야기 #게이소설 #커밍아웃 #해외증권사 #외국계증권사 #외국계은행 #외국계회사 #도이처크레딧 #deutscherkredit #졸업학기 #코스모스졸업 #취준 #취준생 #취업 #취업전쟁 #인턴 #증권사 #해외증권사 #외국계증권사 #외국계회사 #애널 #애널리스트 #analyst #증권애널리스트 #증권사애널리스트 #equityanalyst #researchanalyst #리서치 #증권리서치 #주식리서치 #조사부 #주식조사부 #research #equityresearch #리서치어시턴트 #researchassistant #ra #면접 #취업면접 #실전면접 #인터뷰 #취업인터뷰 #실전인터뷰 #정규직 #정직원 #정사원 #합격축하 #최종합격 #합격통보 #취업성공 #오퍼

이전 07화 담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