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역에서 내려 Pierpoint 사무실에 도착했다. 조금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로비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인터뷰 5분 전에 리셉션 데스크로 향했다. 경비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외부인 출입증이 달린 목걸이를 회색 캐시미어 스웨터에 두르고 2 층 미팅룸으로 올라갔다.
창 밖으로 정동 돌담길이 넌지시 보였다. 도대체 Pierpoint는 어떻게 이런 명당에 건축 허가를 받을 수 있었지? 서울 시청 도시계획과의 누군가는 그들에게 받은 하얀 봉투로 아파트를 장만했을지도 모른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9시 뉴스의 돈다발 사과박스 레퍼토리처럼 말이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명이 입장했다.
“안녕하세요 세진 씨, 김우식입니다. 와줘서 고마워요. 연말 보고서 쓰느라 요즘 무척 바쁩니다.”
“안녕하세요 선배.. 아니 이사님. 손세진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잠은 책상 밑에서 자는지. 머리는 사내 세면대에서 감는지. 수염은 나무칼로 다듬는지. 돈을 억수로 벌어도 쓸 시간이 전혀 없다는 반증이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쪽은 보험 섹터 애널리스트 최민섭 이사예요.”
‘아니 웬 보험.. 나 보험 진짜 관심 없는데..’ 사실이다. 이자율이 오르면 생보사들이 돈을 버는 구조인지 잃는 구조인지도 모른다. 그냥 자산 부채 구조가 개복잡하다.
“최민섭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손세진이라고 합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식 선배가 살짝 당황한 내 표정을 보고 디브리핑해줬다.
“세진 씨가 지원한 자리가 사실 저희 둘 다 서포트하는 RA롤이에요. 그리고 추가로 한국 주식시장 전략 보고서를 집필하시는 저희 리서치 팀장님도 조금 어시스트해야 하고요. 팀장님에겐 거시적인 은행 섹터가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저랑 겹치는 데이터 분석이 많아요.”
‘헐.. 그럼 난 세명의 엑셀 파일들 사이에서 돌림빵 당할 거란 뜻인가..’ 그렇다면 월급도 트리플로 줄 거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선배에게 질문했다.
“그럼 저는 어느 애널리스트 보조가 메인 업무인가요?”
“세진 씨는 정식적으로 제 RA이에요.”
우식 선배의 대답이 내가 당연히 RA로 선발될 거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들려서 잠시 기뻤지만 과중할 업무량을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나는 당돌하게 추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RA 로서 제 이름도 은행 섹터 보고서에 명시되나요?”
둘이 웃었다. 최민섭 이사가 입을 열었다.
“회사를 커버하는 메인 애널리스트만 이름을 올릴 수 있어요. 그리고 팀장님께서는 CFA (공인재무분석사) 합격자들만 애널리스트로 승격시켜 주세요. 3년 동안 자동차 섹터 RA 하다가 이번 가을에 CFA 합격해서 드디어 국내 타이어 섹터 커버리지 개시하는 남준호 애널리스트가 좋은 모범이 될 거예요.” 총 3회에 걸쳐 치러지는 CFA 시험을 통과하려면 최소한 2년이 걸린다. 1차 시험은 대충 공부해서 통과할 수 있는 기본 회계 위주의 내용이지만 2, 3차는 기업재무, 자산 평가, 포트폴리오 운용, 통계, 심지어 최근 화두가 된 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관련 내용까지 머리띠 싸매고 파고들어야 한다. 정말 방대한 분량이다.
그들의 말을 풀이하자면 최소 3년 동안 보조로 밤샘 따까리 하며 틈새 시간에 CFA 공부도 하면서 시험에 합격해야만 Pierpoint 주식 보고서에 내 이름과 연락처가 인쇄된다는 거다. 그 이전까지는 나의 존재감이란 1도 없다. 해외 기관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세진 씨, 어차피 리서치 팀장님하고 날 잡고 면담해야 될 텐데 지금 하는 거 어때?”
그들의 입에서 반말이 나왔다. 이건 청신호. 뭐가 맘에 든 거지?
“네 지금 괜찮아요.”
“사실, 지금 같이 일하는 취리히 류 차장님께 레퍼런스 체크를 했어, 엄청 칭찬하더라고, 세진 씨를.”
“아.. 진짜요?”
류 차장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하고 잠시 고민했다. 몇 분 후 우식 선배가 나를 팀장님의 개인 사무실로 인도해 줬다. 가는 길에 리서치 부서를 지났다. 낮은 칸막이가 쳐진 개방형 사무실이었지만 다든 쥐 죽은 듯 조용히 타이핑만 치고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독서실 분위기였다.
“어 그래, 어서 와. 여기 앉아. ”
신태호팀장님은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네덜란드 에라스무스 대학교 교환 학기 때 수강과목 개수가 왜 이렇게 적냐부터 시작해서.. 당연히 그는 내가 과목 절반을 낙제한 건 모르겠지. 협정상 낙제한 과목은 아예 성적표에서 빠지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거기서 배운 것 중 주식 리서치와 관련 있는 게 있냐는 질문. 나는 'investor relations'에 대한 수업에서 주워들은 내용을 상기하며 그가 듣고 싶어 할 만한 답변을 대충 끼워 맞췄다. 투자자들의 장기적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정보의 투명성이 제고되어야 되는데 어쩌고 저쩌고 블라 블라..
그는 괜찮은 신입 하나 낚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긴장을 풀면 안 된다. 까다로운 사람일수록 내가 더 많은 질문을 쉴 틈 없이 열거해야 한다. 열정의 표시이다. 아이 엠 헝그리 코스프레.
나는 그의 책상 옆 벽에 부착된 Pierpoint 설립 연혁 포스터를 가리켰다. 80년대에 발행된 듯 빈티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잊힌 지 오래된 Pierpoint의 전신 회사들의 이름이 곳곳에 적혀 있었다. 50년 동안의 자잘한 인수합병을 통해 이 은행이 오늘날의 막강한 Pierpoint 가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혼외 자식과 이복형제로 얽힌 어느 프랑스 모던 가족의 난잡한 가계도 같아 보이기도 했다. 수업을 같이 들었던 끌로에가 생각나네..
“이 포스터는 미국 동료에게 선물로 받으신 거예요? 상당히 오래된 것 같아서요.”
그가 커피와 흡연으로 노랗게 찌든 이빨을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로마의 대저택들에서나 볼 수 있는 모란디의 정물화가 걸린 벽의 컬러 같은 노란색이었다. 펜디 (Fendi)의 하우스 컬러인 칙칙한 파스텔 병아리색의 기원과 같은..
“저거 내 하버드 MBA 친구 아버지가 주신 거야. 그분이 80년대 Pierpoint에 투자은행 업무를 신설하셨거든. 아니었으면 그냥 덩치 큰 미국 예출금 은행이었을 거야. 내가 Pierpoint 서울 사무소에서 일한다고 하니까 서재에서 이 포스터를 떼어 주시더라고."
“아 네. 감동이네요.”
“그치.."
그러고 신태호 팀장님은 즉석에서 구두 오퍼를 주셨다. 시원시원했다. 계약서는 내일 아침 인사부에서 등기로 집으로 보내줄 거라고. 떠나기 전에 인사과장을 잠깐 만나라고 하시더니 전화기의 스피커를 켜고 내선번호 네 자릿수를 눌렀다. 와 인터뷰가 이렇게 속전속결이라니.
“응 박 과장. 나야. 지금 손세진이라고 지원자 한 명 보낼 테니 둘이 인사 나눠.."
팀장님의 말투로 봐서는 그는 거의 이 회사를 거의 평정한 사람 같았다. 어쨌든 나는 더 이상 석유나 담배를 파는 회사로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투자은행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나는 수지에게 전화했다. 이태원 근처에서 술 한잔 하자고. 어차피 그녀가 다니는 대일기획의 사무실과 가까워 부담이 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우리가 갈 장소는 뻔했다. 저번에 프랑수아가 소개해준 후시기 (不思議; 미스테리, 희한함을 뜻하는 일본어)라는 간판 없는 바. 게이바지만 도쿄 나카메구로의 어느 미드 센츄리 가구점에 들어온 기분이 드는 곳이다. 바로 위층에는 치킨 호프라고 쓰인 형광 간판이 키치 하게 번쩍이고 있기 때문에 수지는 별 어려움 없이 바를 찾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내 성 정체성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라 이런 곳에 같이 가곤 한다. 무엇보다 무국적스러운 비한국적인 분위기에 흥미를 느낀다고..
“너 뭐 마셔?”
그녀는 내 빨강 칵테일잔을 유심히 관찰했다.
“네그로니. 오늘은 좀 달착지근하고 씁쓸한 게 땡기네.."
잔을 부딪히고 오늘 받았던 잡 오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축하해 줬다. 구직난에 그런 귀한 자리를 용케 찾았다고. 하지만 그녀도 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자리는 Deutscher Kredit의 정규직이라는 걸. 불법 체류자가 아닌 신분으로 런던에 갈 수 있는 티켓과도 같은..
“야 근데. 오늘 개 엄했어. 회사 건물 5층 비상통로 옆에 테라스를 발견했는데.."
수지는 대일기획에 입사한 지 1년이 채 안 됐다. 미국계 광고기획사를 다니다가 스카우트된 상황이라 막 적응 중이었다. 대일기획은 북성그룹 창업자의 막내 손녀가 경영하는 회사였고 북성전자의 모든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독점하고 있었다. 어쨌든 수지는 재벌 손녀 집무실 바로 앞의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다 시큐리티한테 걸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행히 모두가 퇴근한 시간이었다.
“아니, 회장이 5층을 쓴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테라스가 그녀 전용공간이라는 걸 어떻게 알겠냐고.. 오리엔테이션 했던 우리 회의실에서 연결되는 테라스였는데, 그 테라스가 엄청 커서 회장 집무실 앞까지 연결되는 구조더라고. 회의실에서 거기로 절대 안 나간다는데 난 몰랐지.”
손녀가 봤으면 얼마나 황당했을까. 제발 담배꽁초라도 신발 밑창으로 밟아 버리고 오지 않았기를 바랐다. 계급이 나뉜 게 분명히 느껴지는 영국 같은 곳과는 달리 2천 년대 초반의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어지간히 수평적인 사회였다. 창업자 손녀의 집무실과 일반 사무직의 회의실이 같은 층에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수지는 내게 지적 동경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한국 토종이지만 제1세계 아트와 팝컬쳐에 일찌감치 눈떴다. 아마도 방대한 독서량 때문이었겠지. 그래서 우리가 잘 통했는지 모른다. 카피라이터 입사 시험에 대한 그녀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시험 문제는 주어진 서른 개의 단어를 활용해 짧은 시를 지어보라는 것이었다 한다. 단어들은 그 해 이슈화됐던 사건과 사람들. ‘질 샌더’ (Jil Sander)와 ‘고집’이라는 단어를 한 행에 묶은 지원자는 아마도 수지가 유일했을 거다. 질 샌더는 다지인 방향성에 대한 마찰로 브랜드 소유주인 프라다 그룹으로부터 또 한 번 자기 회사에서 쫓겨나게 됐다. 뉴 밀레니엄의 도래와 더불어 섹스와 블링블링으로 무장한 톰 포드의 천박한 구찌부대가 대중매체를 침입할 때, 질 샌더는 그녀만의 미니멀리즘을 고수했다. 그 시절 질 샌더의 감성을 캐치한 대학생은 거의 없었고, 패션 업계 종사자가 아닌 이상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을 거다. 그래서 나는 더 수지에게 매력을 느꼈다.
우리는 ‘현대사회와 영상매체’라는 교양수업 때 우연히 옆에 앉았던 걸 계기로 친해졌다. 200명이 넘는 대형 강의였다. 모든 학부의 학생들이 같이 듣는 교양 수업을 없애고 메마른 경영 수업으로만 시간표를 메꾸었다면 국문학과인 수지를 만날 수 없었겠지? 단편 영화 제작을 위한 조편성 때 나는 그녀의 그룹에 꼽사리 끼어 별 노동 없이 교내 영화제에서 1등을 하는 영광으로 누렸다. 수지는 조장을 맡으면서 촬영부터 편집까지 모두 도맡았다. 나의 기여는 동이 틀 무렵의 해변에서 멍하게 서서 독백 몇 줄 읊는 정도- 배우역할을 맡았다는 소리다. 그녀가 지은 영화 제목도 인상 깊었다. ‘바다는 빗물에 젖지 않는다.’
영화 작업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자주 만나 놀았다. 말이 잘 통했고 음악이나 영화 취향도 왠지 비슷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수지가 매일 행복하기 어려운 공간으로 귀가한다는 것을. IMF때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이 고생하고 있고, 그녀 역시 아르바이트로 집안을 돕고 있었다. 수지를 안 지 얼마 안 됐을 때 신촌 호프집에서 술 마신 밤이 기억난다. 그때 진정 얼마나 쉴 틈 없이 빡세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등록금을 직접 번다고? 그게 가능해?”
“응, 과외를 3-4개 정도 하면 돼..”
“주 2회니까 거의 매일 과외하러 가는 건데.. 그럼.. 언제 술 마셔?”
“지금, 너랑 마시고 있잖아. 과외 갔다 온 거임.”
그날 처음 알았다. 등록금을 직접 버는 친구도 있다는 것을. 방학 때마다 해외로 튀어버리고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명문대학에 쉽게 들어온 나를 보며 그녀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 거다. 그렇지만 내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군대를 다녀온 사이, 그녀는 음반 마케팅 회사를 거쳐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나도 이제 투자은행에 들어가면 방학이고 뭐고 쉴 틈 없이 바쁘겠지. 수지도 나도 어느새 어엿한 직장인이 된 것이다.
“너 요즘 무슨 프로젝트하니?”
“이번엔 국내 1위 비만 클리닉이 클라이언트야. 카피를 이렇게 썼지- ‘당신 안에 숨어있는 S라인을 찾아라.’ 미켈란젤로가 그랬거든. 투박한 대리석안에는 매끄러운 여신상이 들어있다고. 자기는 그걸 꺼내기만 한 거라고, 조각한 게 아니라. 우리 몸 안에도 육체적인 아름다움이 숨어있다는 뭐 그런 거지.."
수지 옆 자리에 남미계 같아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더니 홀로 앉았다. 포크레인 기사처럼, 아니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처럼 불끈 솟아오른 근육들이 그의 상체를 가득 채워 육감적이었다. 자신도 그걸 아는지 몸에 딱 붙는 반팔티셔츠를 입었다. 햇살에 그을려진 갈색 피부는 봉숭아에 물든 것처럼 붉은기를 띠고 있었다. 눈이 몇 번 마주쳤다. 그의 뜨거운 시선이 수지를 통과해 내 몸에 오래 머무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단 한 명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묘해질 수 있는 건 지. 긴장감이 돌기 시작하고 수지는 내 눈빛을 보더니 알겠다는 듯 먼저 들어가겠다며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 이름 없는 남자는 몸으로 대화할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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