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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May 10. 2024

[언어라이브드] K-게이 런던 뱅커 성장기: D사 1

  취리히 증권 인턴십의 남은 기간은 고작 2주. 비밀리에 다닌 4학년 마지막 학기는 4주 후 종강. 그리고 현재까지 확보해 놓은 풀타임 오퍼는 3개. 그리고 중간중간 꽤 만족스러웠던 데이트도 했다. 원나잇들이었지만. 여하튼 나름 성공적인 두 달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내가 가장 원하던 Deutscher Kredit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았다. 갈망했던 런던 여름 연수의 꿈은 플라스틱 욕조 안의 물거품처럼 서서히 꺼지고 있었다.


  반면 류 차장님은 나를 많이 칭찬해 줬다. 세 군데나 오퍼를 받았다니 대단하다고. 여기 거쳐간 애들은 다 잘 된다고 축하한다고 하면서 등을 톡톡 치더니 은근슬쩍 쓰다듬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넘어간 남자인턴들이 있었을까? 터치가 매우 능숙한 느낌이다. 휴. 이래도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데 어쩌지.. 그냥 커밍아웃해버릴까? 어릴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 온 누나라 이해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다. 그래도 업계 사람이라 조심하는 게 좋겠다. 이 세계는 정말 좁으니까. 존경스러웠던 그녀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다니.. 하지만 그녀가 오늘 신고 온 YSL 페이턴트 가죽 구두는 죽였다. 월급을 다 옷 사는데 쓰는 걸까. 원래 좀 있는 집 딸인 걸까. 후자겠지. 어릴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왔으니. 일반인 봉급으로 도심부 월세 내다가 개인 파산 신청 들어가는 수 있다.


  “세진, 어디로 결정했어. Pierpoint 갈 거지?”


  “네, 아마도요. 다 차장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축하해. 언제 한번 와인이나 사~”


  “그럼요, 당연히 사야죠.”


  와인 바? 가기 싫지만 류 차장님이 도와준 게 많긴 하다. Pierpoint 레퍼런스 체크에서 추천도 해주고, 학교에 있으면서 킨코스에 있다고 둘러댈 때마다 봐주고, 고맙기 그지없지만 뭔가 데이트 분위기를 연출할 것 같아서.. 같이 술 마시긴 싫다. 그래도 뭐, 대답을 듣기 좋게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남은 2주간 어떻게 그녀의 추파를 피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 순간, 권 이사님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거기 리서치 팀장 하드코어라는데. 내가 아는 동생이 거기 컨슈머 섹터 RA인데, 하도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원형 탈모증 왔대. 너 연희대 선배야. 결혼 적령기라 데이트 있다고 할 때만 보내준대. 그것도 엄청 캐묻는데.”


  인터뷰가 끝나고 피식 웃을 때 드러났던 신팀장님의 누런 이빨과 그의 책상 위 널브러진 커피 종이컵들이 떠올랐다. 나는 책가방에 있는 Pierpoint 계약서를 꺼냈다. 사인 데드라인이 오늘까지였다.


  “잠깐 Pierpoint 좀 다녀오겠습니다. 계약서 쓰러요.”


  “오케이, 잘 다녀오셔.”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정동 돌담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처럼 가볍지는 않았다. Pierpoint 서울 사무소에 도착해 인사과 박 과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다시 도서관 같은 리서치를 부서를 지나 그녀의 방에 도착했다.


  “세진 씨, 입사 결정 축하드려요. 계약서는 꼼꼼히 읽어봤을 거라고 믿어요. 여기 두 번째 페이지랑 다섯 번째 페이지 하단에 사인하면 돼요.”


  나는 영문으로 사인했다. 그런데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리더니 찌든 커피 향이 공간을 침입했다. 팔꿈치까지 접힌 와이셔츠와 함께 나타난 미스테리 게스트는 바로 신태호 팀장님.


  “세진, 너 지나가는 거 보고 따라왔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응~ 그래그래. 그런데 사인하는 게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이런 거 다 읽을 필요 없어. 그냥 빨리 끝내. 우리 애널리스트 두 명이 세진 씨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새벽 1시에 퇴근하지만 세진 씨 오면 11시 정도엔 퇴근할 수 있겠지. 다음 주부터 실적 발표라 일이 태산이야. 다음 주부터 나올 수 있지? 맞다. 종강은 했나?”


  박 과장님이 썩소를 지었다. 그녀의 속마음은 아마 ‘미친 거 아니야? 사인하는 신입 앞에서 벌써부터?’ 사무실에 앉은 지 3분이 채 안 됐다. 그런데 느리게 사인한다고 쪼임을 당하고 있다니. 앞으로 일어날 미래가 눈에 그려진다.. 나는 마지막 사인을 날렸다. 두터운 베이지색 계약서 표지를 덮었다. 거기 쓰여 있는 내 이름은 너무 갈겨져 있어,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돌담길을 따라 다시 종각역으로 향했다. 거리에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자유분방했던 나의 대학 시절이 끝나버리는 건가. 전국 금융 회사 실적 보고서, 알로 꽉 찬 동태처럼 숫자로 가득 채워진 엑셀 파일들. 그리고 신태호 팀장님의 논스톱 갈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 암울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발신자 제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Deutscher Kredit 인사과입니다. 손세진 씨 맞으시죠?”


  ‘기다렸던 전화다. 할렐루야.’


  “네, 맞습니다.”


  “네, 다름이 아니라 손세진 씨 도이처 크레딧 1차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요. 축하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2차는 서울에서 실무자 면접이고 3차는 싱가포르 아시아 임원들과의 면접이에요. 제가 이메일로 2차 면접 가능 시간 알려드릴 테니 편한 시간 답장해 주세요. 다음 주에 진행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이메일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중충하던 정동 돌담길이 런웨이처럼 밝혀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종각역을 향해 힘차게 워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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