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기와거울 May 18. 2024

D사 2

  사실 Deutscher Kredit 지원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는 올해 봄이었다. 네덜란드 에라스무스 대학에서 교환학기를 듣던 도중 Deutscher Kredit과 시카고 컨설팅 그룹 여름 인턴십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로 잠깐 날아왔다. 그렇지만 그때 집에서 옷을 여러 번 갈아입다가 Deutscher Kredit 인터뷰에 15분이나 늦어버렸다. 왜 유난히 스스로가 못나 보이는 날이 있지 않은가. 패션으로 자신감을 채우려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지나 있었고, 담당자는 나처럼 늦은 지원자는 처음 본다고 했다.. 허무하게 인터뷰는 종료되었다. 내 지원서를 성심껏 교정해 준 비욘에게도 정말 미안했다..


  하지만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 합격하면 인턴기간 따위는 없다. 원샷 채용이다. 국내 외국계 투자은행 중 유일하게 정규직 채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Deutscher Kredit -천장을 뚫는 경쟁률을 생각하면 자신감이 다시 콩알만 해지긴 했다.


  인사팀 과장님이 로비에 나와있었다.


  “손세진 씨. 오늘은 3개의 인터뷰 라운드가 있어요. 처음은 아시아 지역 신입 리쿠르팅 담당자 마르니 슈와르츠맨이고요, 두 번째는 봉진수 상무님과 원진희 상무님, 그리고 마지막은 홍콩 출장 중이신 Deutscher Kredit 하성식 대표님과의 화상콜이에요.”


  첫 번째 회의실로 인도받았다.


  코딱지만 한 방 안에 컨퍼런스 콜 용용 스피커 전화기 한대가 켜져 있었다.  


  나는 마르니가 방에 오기를 기다렸다.


  스피커에서 잡음이 튀어나오더니 앵앵거리는 젊은 미국 여자의 목소리가 방을 메웠다.


  “Hi Say-Jean? I am so sorry. Is this how you pronounce your name?”

  (안녕하세요 세이-쥔? 무지 미안해요. 이름 맞게 발음했나요?)


  “Hi, it’s Saejin but that was close enough (아이스 브레이킹 웃음). You must be Marny?”

  (안녕하세요. 세진입니다. 그 정도면 정확합니다. 마르니세요?)


  “Hi Saejin! This is Marny. Thank you so much for coming today. I caught the flu so decided it would be best to work from my hotel.”

  (안녕하세요 세진! 네, 마르니입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기가 걸려 호텔방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너무 선구적이다. 전 세계가 판데믹으로 뒤집어지는 바람에 ‘work from home’ (재택근무) 개념이 생겨나게 되기 15년 전에 이미 이 언니는 노트북이랑 회사 전화기를 싸들고 신라호텔 침대 위에서 훌쩍이는 코를 풀며 내 전화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Why do you want to work for Deutscher Kredit?” (왜 Deutscher Kredit에서 일하고 싶으세요?)으로 시작하여 “What are your strengths and weaknesses?” (본인의 장단점이 뭐예요?)로 인터뷰는 마무리됐다. 너무나 상투적인 질문들. 나는 최대한 희망차게 나의 열정을 구리선을 통해 그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만족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생각해 봐라. 법카로 무한 룸서비스를 시키고 누워있는 호텔 방구석이 얼마나 지겹고 따분했을까. 시원시원하게 엔터테인 해주는 지원자가 그녀의 흥미를 돋구어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스피커로 마침 인사를 했다.


  조금 더 큰 방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중년 남성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응, 그래. 여기 앉아.”


  “난 봉진수 상무이고 이쪽은 원진희 상무야. 우리는 비금융계 기업재무 관련 상품 세일즈를 맡고 있어. 난 공기업, 원 상무는 비공기업. “


  나중에 봉상무님이 과천 종합청사 고위 공무원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족발 대접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장충동 삼대집에서 직접 구매해서 말이이다. 넥스트 레벨 해프닝은 봉상무에게 고객이 감기 걸렸다고 전화로 투덜댔더니 퇴근 길에 고객의 아파트 경비실까지 달려가서 판피린Q 를 맡기고 온 일이다. 이 정도로 국내 영업 세계는 살벌하고 치열했다.


  원 상무님이 말을 이었다.


  “너 레쥬메 잠깐 보니까 취리히 증권에서 채권 발행 업무 좀 했다며? 만약에 뽑히면 아마 그런 일도 보조하게 될 거야. 자기소개 간단하게 해 봐.”


  중요한 순간이었다. 실무자들은 내 레쥬메를 10초 정도 훑어봤을 거다. 나는 어렸을 때 해외 생활을 바탕으로 키운 적응력으로 시작해 취리히 증권 인턴십동안 배웠던 점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호소력이었다. 내용만 따지면 서류 합격자들은 다 백점 만점짜리들이었다.


  “그래, 좋아. 그런데 세일즈를 하고 싶은 이유가 뭐야?


  “업계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놈이 되고 싶습니다.”


  둘이 ‘바쁜 와중 왜 나 인터뷰실에 끌고 들어왔어?’식의 불만 섞인 표정으로 웃었다. 나도 내 자신의 즉흥적인 답변에 놀랐다. 지명을 기다리는 호스트가 된 느낌. 가방끈이 더 길었을 뿐이지 업계 간 이윤 구조는 어쩌면 비슷할 지도 모른다. 누구나 고객의 행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포주 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 않나.


  이게 내 미래 보스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아마 세 라운드에 걸친 인터뷰 중 가장 중요한 인터뷰였을 것이다.


  “오늘 마지막 인터뷰까지 잘 마치길 행운을 비네.”


  봉상무님이 말을 마치신 후 나는 두 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방을 나왔다. 이제 한 번만 더 보면 2차 면접은 끝난다. 나는 다시 로비로 가서 마지막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통로에서 연희대 동기가 튀어나왔다.


  “어, 지민, 너도 오늘 인터뷰야? (그는 나보다 훨씬 똑똑한 공붓벌레였다. 놀기도 잘 놀았다)”


  “세진! 야, 나 망했어..”


  “왜?”


  “홍콩 화상 인터뷰 보는데 대표님이 내 취미가 뭐냐고 물으셨거든..”


  “그런데 그게 어째서?”


  “힙합이라 그랬더니 서서 한번 춰보래. 진정한 세일즈맨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냐고?”


  웃음을 참았다. 눈물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췄어?”


  “응, 서서 아무런 반주 없이 그루브를 타기 시작했는데 화면이 정지된 거야. IT팀이 와서 몇 분 후 다시 연결시켜 줬는데 대표님은 이미 자리를 뜨셨더라고. 인사도 못하고 나왔어.”


  우리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바라봤다.


  “손세진 씨, 다음 차례입니다.”


  나는 지민이와 눈으로 인사하고 인사팀 과장님을 뒤쫓아갔다. 취미를 물으면 답변을 피해야 하는 장르들을 머릿속에 나열해 보았다. 내 디폴트는 음악 감상인데 절대 말해서는 안 된다.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건 딱 질색이니까. 고등학교에 전학 왔을 때 애들이 억지로 노래를 시켰는데 끝까지 안 불렀더니 분위기가 싸해졌었었다. 방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향해 인사했다. 화면 안에는 하성식 대표님이 앉아 계셨다. 그의 뒤로 홍콩만의 청록색 바다 전경이 펼쳐졌다.


  “그래, 손세진이. 오늘 자네가 내 마지막 인터뷰네. 지원하는 자리가 세일즈롤인 거는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세일즈는 말이야. 특색이 있어야 되거든. 뭔지 알겠어?”


  “네, 조금은요. 남들 비해 기억에 남아야 할 무언가가.."


  “그치. 자네들 레벨에서는 다 스마트해. 그걸로 불충분하다고.”


  지민이가 당황했던 질문이 튕겨 나올 것 같았다.


  “자네 뭐 좋아하나?”


  이건 ‘네 특기가 뭐냐?’보다 조금 포괄적인 물음이었다. 공감대를 어느 정도 유지하며 썰 풀기가 쉬웠다. 하지만 위험이 도사렸다. 이상한 답변으로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봉착하게 된다.


  “술 마시기요.”


  대표님이 잠에서 깬 듯 눈이 똥그래졌다. 이 반응은 모 아니면 도.


  “어 그래? 어떤 술 좋아해?”


  이 상황에 ‘적당히 오크통 숙성된 부르고뉴산 화이트 사랑해요. 뫼르소 (Meursault), 아니면 가성비 훌륭한 푸이 퓨이세 (Pouilly-Fuissé) 라도 어떨까요?’라고 받아치면 졸업식도 마치치 않은 대학생이 분수에 맞지 않게, 재수 없게 취향만 고급이라고 욕먹고 탈락한다.


  “소주요.”


  나는 소주를 자발적으로 입술에 갖다 댄 적도 없다. 아스파탐 인공당 탄 희석식 에탄올은 내 취향이 아니다.


  “주량은?”


  “두 병이요.”


  작년 연희대 축제 때 동동주 반 병 마시고 구토하고 난리 친 게 엊그제 같다.


  “오. 자네 훌륭하네.”


  그다음 대표님은 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1초 후 다시 끄덕여지는 LCD 위 내 투사체를 보며 경청했다. 대표님이 다음 미팅에 급하게 가야 하니 미안하다고 하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도 같이 인사드리고 로비로 나왔다.


  “세진 씨, 오늘 수고하셨어요. 2차 면접 결과는 모레 오후에 전화로 통보될 거예요. 합격자들은 다음 주 화요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3차 면접에 참석하기 위해 월요일에 출발해야 되고요. 급히 진행되는 것 이해해 주세요. 곧 통화해요.”


  “네, 감사합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나는 조용히 Deutscher Kredit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정말 최종 인터뷰까지 꼭 가보고 싶었다. 앞으로 일주일 반안에  모든 것이 결정 날 것이다.




#노벨라 #comingofage #취업 #해외취업 #영국취업 #런던취업 #런던직장인 #런던투자은행 #런던금융 #런던은행 #국제금융 #더시티 #thecity #헤지펀드 #파생상품 #골드만삭스 #투자은행 #investmentbanking #LGBT #게이 #게이이야기 #게이소설 #커밍아웃 #해외증권사 #외국계증권사 #외국계은행 #외국계회사 #도이처크레딧 #deutscherkredit #판피린 #판피린큐 #뫼르소 #meursault 푸이퓨이세 #pouillyfuisse #샤도네이 #chardonnay #부르고뉴 #burgundy #부르고뉴와인 #burgundywine #소주주량 #화상면접 #화상회의 #면접 #취업면접 #실전면접 #최종면접 #인터뷰 #취업인터뷰 #실전인터뷰 #최종인터뷰 #정규직 #정직원 #정사원 #합격축하 #최종합격 #합격통보 #취업성공 #오퍼

이전 10화 D사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