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utscher Kredit (DK) 입사일은 밸런타인데이 다음 날인 2월 15일이었다. 밸런타인데이엔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4개월만 서울 사무소에서 일하고 6월 중순이면 런던으로 가게 되니 로망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전 세계에서 선발된 신입 사원들과 두 달간의 교육을 받은 후 뉴욕, 런던, 홍콩, 싱가포르의 다양한 부서에 배치되어 석 달 동안 로테이션 된다. 신입들은 실무를 체험하고 싶은 부서를 세 개를 골라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새내기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같이 작은 지사에서 온 지원자들은 상황이 달랐다. 이미 정해진 직무가 있었기 때문에 맛보기용 로테이션 후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봄부터 한국 사무소에서의 본인의 직무를 미리 시작하다가 여름에 런던 본사의 교육 프로그램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DK 서울 사무소는 종로 타워 2개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35층은 만성 적자 주식부. 그리고 36층에는 이자율, 외환 그리고 각종 파생상품을 다루는 두 개의 팀이 있었다. 하나는 금융기관 세일즈팀, 다른 하나는 비금융 기업 세일즈 팀. 쉽게 말해 전자는 자산 증식을 도울 수 있는 투자성 상품을 도매로 판매했다. 예를 들어 시중 은행 창구에서 판매하는 코스피 지수 연동 적금을 생각해 봐라. 비록 개인은 거래 은행과 적금계약을 체결하는 것이지만 그 상품 배후에는 투자은행들의 제품 설계 노하우가 깔려있다. 반면 비금융 기업 세일즈 팀에서는 국내 대기업, 공기업 또는 외국계 제조회사의 자금부를 대상으로 채권을 발행해 주거나 회수를 앞둔 수출대금의 외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줬다.
나는 비금융 기업 세일즈 팀에 합류했다. 시니어들은 굵직한 재벌, 공기업을 맡고 나 같은 말단은 외국계 다국적 기업들을 대상으로 잡화상 노릇을 해야 했다. 외환도 매매해 주고, 외화 채권 발행을 위한 기초 업무도 다져줘야 했고 심지어 가끔씩 석유 선물 계약도 체결했다. 내 데스크 위치는 금융 기관 세일즈 팀과 얼굴을 맞댄 열의 맨 가장자리이었다. 심심하면 LCD 스크린 사이로 그들을 관찰할 수 있는 자리였다.
DK의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면 외국계 투자은행 치고 완전 로컬은행 아재 삘이 났다는 점이다. 서울 사무소 인원의 90% 이상은 한국인이었다. 옛날에 누가 이런 말 한 게 기억났다. DK 서울 사무소와 경쟁 외국계 투자은행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후자는 오후 되면 남자들 턱수염 도로 나있고 회사 전층에서 암내가 풍긴다는 점. 왜 그런 업계설이 생겼는지 이해 갔다.
우리 층의 유일한 외국인은 두 명뿐이었으며, 둘 다 싱가포르인이었다. 남녀가 짝꿍같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이 든 남자는 한국 국채 트레이더로 K-드라마에 푹 빠져 한국 사무소로 이동을 신청하게 되었다고 했다. 젊은 여자는 한국 회사채 트레이더였다. 작년에 입사한 신입인데 런던 연수 프로그램에서 최종 성적 1위를 했던 인재였다. 그런데 싱가포르에서 보스랑 몰래 자다가 까발려져 서울로 좌천되었단다. 그 보스는 오히려 진급해서 떵떵거리며 잘 산다고. 혼외 섹스 스캔들의 결과가 참 불공평하지 않나 싶었다. 결혼한 상태에서 여자후배와 바람을 핀 남자 보스는 오히려 승진을 했다니.. 유부남이 어린 여자와 자는 건 그의 매력의 일환이고, 보스와 잔 여자 신입은 성적 매력을 이용하는 비뚤어진 야망의 소유자로 해석되는 걸까. 아무리 유럽에 본사를 두었다고 해도, 이곳 역시 전근대적 남성 중심의 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쉬웠다. 나는 자리에 앉아 할머니가 새벽에 일어나 준비해 주신 도시락을 서랍에 넣고 입사 안내 이메일을 읽고 있었다. 시큼한 우메보시와 내가 사랑하는 달착 구수한 뱅어포의 냄새 조합이 묘했다. 할머니는 요리 솜씨가 그저 그랬지만 비주얼은 일본의 중장년층 여성 월간지 <가정화보 (家庭画報)>에서나 볼법한 교토 극상급 카이세키를 추구했다. 과연 단층 놋쇠 도시락통을 어떤 배열로 촘촘히 메꾸어 주셨을는지. 할머니는 아마 내가 점심 챙겨 먹을 시간도 없는 은행창구 텔러로 입사한 줄 아시나 보다.
그런데 부장이란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LCD 스크린 너머로 말을 걸었다.
“어우. 신입이라며.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손세진이라고 합니다. 비금융 기업 세일즈팀 조인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박재범이야. 그냥 Greg라 불러.”
‘또 이 지랄이네. 하이 그레그? 그렉? 그뤡?’
“네, 그렉.”
그렉은 앉더니 거울 보며 종이 가위로 코털을 깎기 시작했다. 남자 싱가포르 트레이더는 곁눈질로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쇼킹했다. 이 행동이 어처구니없어 보였지만 세 가지 의미를 내포했다. 첫째, 품격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 둘째, 그렉이 이런 추태를 부려도 전혀 쪽팔리지 않을 정도로 은행에 돈을 많이 벌어다 준다는 것. 셋째, 은행에서 돈 많이 벌어다 주는 사람들은 뭘 하든 터치 안 한다는 것. 마지막 포인트는 투자은행업계 경전이다. 면전에서 진리를 목격한 셈이다. 그렉은 가위를 다시 서랍에 넣더니 면세가 60만 원짜리 라메르 (La Mer) 크림을 처 바르기 시작했다. 라메르는 미국 항공우주국 NASA 출신 과학자가 심층 해양성분을 발효시켜 개발했다는 크림계의 에르메스 버킨 (Birkin) 백이다. 구라이겠지만 화이트닝, 보습에 올인하는 동양인들에게는 그럴싸한 마케팅 메시지였다. 서양인들은 컨투어링, 발색에 월급 갖다 바치지만 말이다. 원조국 미국 다음으로 한국이 세계 판매 2위라니.. 그렉이 하얀 제형의 마법 크림을 거친 얼굴에 도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lipstick on a pig’ (립스틱 바른 돼지; 한국 정서로는 매니큐어, 아니 네일아트로 대체하는 게 더 와닿는 듯)란 관용구가 문득 생각났다.
나중 그렉은 전사적으로 민폐를 끼치게 되었다. 농협에 파생상품을 판매한 후 직원으로부터 마늘 구매를 부탁받은 거다. 30박스어치를. 세일즈팀 직원들은 각각 2박스씩 사기로 약속하고 현금을 걷었다. 그런데 그렉은 경쟁사로 이직해서 날라버렸고 직원들이 대량 구매한 마늘은 나타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짜증 났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마늘 디폴트’ (채무 불이행)라 하며 웃어넘겨버렸다. 그가 새 회사에서도 남들 앞에서 퍼스널 그루밍할 정도로 실적을 충분히 올렸을지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내 첫 고객은 뮌헨 제약이었다. 저번 달에 서울 오피스를 신설했다. 같은 독일계 회사라 근거 없는 친숙함이 들었고 DK가 글로벌 지정 거래은행이었기 본사 간에 자질구레한 제반 업무가 이미 마쳐진 상황. 나는 거기에다가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수화기를 들었다. 난생 첫 세일즈 콜이었다.
“뮌헨 제약 자금부 윤나미입니다.”
“안녕하세요 윤 부장님, DK 손세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뮌헨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인사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세진 씨. 안 그래도 뮌헨 본사에서 연락 올 거라고 들었어요. 반가워요. 저희가 보통 분기말에 원화금액을 유로로 환전해 본사로 송금해요. 때마침 전화 주셨네요. 지금 그쪽에서는 유로/달러 환율을 어떻게 전망하세요?”
모든 환율은 달러대비이다. 원/달러 방향성에는 자신감이 있는지 바로 유로/달러 전망을 점쳐달라 했다. 이 상황을 대비해 나는 DK 외환 리서치 리포트를 중앙 화면에 띄워놓고 동시 번역을 하기 시작했다. 주어 목적어 앞뒤가 꼬이고 난리였다. 내뱉은 단어들의 절반은 영어였다. 말해 놓고서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 개소리에 본인도 당황했을 거다.
“그렇군요.. 그럼 원화 200억 sell, 유로 buy 호가 좀 알려주세요. 지금 레벨 어때요?”
“아, 그런데 환율 뭐 보세요?”
“야후 환율이요.”
뮌헨 제약은 유럽 삼대 제약사다. 대박 제품 Cuperax는 전 세계에서 화이자의 Zoloft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우울증 처방약이다. 그런데 서울지사 자금부장이란 이 언니는 야후 금융 지식 사이트를 보고 앉아 있었다. 인터넷에 게시된 환율은 실시간 정보가 아니다. 도매시장 거래가는 15분 정도 딜레이 후 대중매체에 무료로 제공된다. 한 달에 200만 원씩 지불해야 서울 외환 교역소에서 실시간 가격 모니터를 설치해 준다. 뮌헨 제약은 코 묻은 푼돈 아끼려다가 나한테 목돈 제대로 삥 뜯기고 있는 셈이다.
“1,250원이에요.” 살짝 쫄았다.
“어머 왜 이렇게 갑자기 올랐어요? 내 스크린은 1,240원인데.”
새 와이셔츠 등판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한 달 전 이태원에서 최고급 이태리 원단을 엄선해 맞춘 거다. 순면에 실크가 5% 함유되어 있었기 때문에 촉감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윤기가 살짝 돌았다. 하지만 단점은 잘 구겨져서 집에서 다림질하는 게 불가능했고 수분을 금방 빨아들였다. 앞으로 드라이 비용이 빡세게 들 것 같아 걱정됐다.
“아, 이번 북성전자 달러부채 상환 규모가 생각보다 클 거라는 루머가 돌면서 지금 달러가 오르기 시작했어요.. 지금 빨리 매수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오늘 사내 채팅방에 누가 써놓은 카더라였다.
“네, 그럼 1,250원에 달러 buy 확정이요. 컨펌 보내주시고 우리 언젠가 커피 한잔 해요. 사무실도 가까운데.."
전화를 마치고 숨을 돌렸다. 등을 맞대고 앉은 봉상무 님이 소리치셨다.
“야, 손세진. 내 고객한테도 그딴 식으로 가격 벌려놓으면 가만히 안 놔둔다.. 이 신입 완전 선수잖아!”
이렇게 내 첫 거래를 마쳤다. 그리고 내 이름 옆에 8천만 원 커미션이 부킹 됐다.
몇 년 뒤 서울에서 나는 40대 중반의 스위스 남자를 만나게 된다. 군터. 그가 뮌헨 제약 서울지사 부사장으로 파견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의 한남동 빌라에는 이태리어 책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재무전공인데 왜 안토니오 그람시 원서로 벽을 도배했냐고 물었다. 생갈렌 (St. Gallen) 대학 시절 이태리 근대 사회학을 부전공했다고 답했다. 그와의 섹스는 벽에 꽂힌 책들만큼 퀄리티가 높았다. 하지만 흥분이 가시면 적막이 흘렀고, 나는 그때마다 무슨 이야깃거리를 꺼낼지 고민했다. 원래 pillow talk란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데 말이다. 유럽 영화에서는 왜 침대에 누워 커플이 이야기를 나누며 담배 한 개비를 나누어 피지 않더냐..
침대 위에 퍼져있는 군터에게 물었다. 너희 회사랑 거래한 적 있는데 나미였었던가? 그 팀장님 잘 있냐고. 군터는 본사 지시로 서울지사 자금부 팀장을 재작년에 갈아치웠다고 했다. 자기가 파견된 이후 외환 트레이딩 시스템이 제대로 세팅되었다고. 그는 자랑스러워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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