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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May 28. 2024

인연

  지금은 7월 1일 금요일. 런던 연수 프로그램은 8월 1일 월요일에 시작한다. 책상 위에서 챙겨갈 것은 재무계산기와 아시아나 런던 왕복 항공권뿐이었다. 돌아오는 날짜는 미정으로 해두었다. 창가에 무성하게 자란 화초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던 것 같다. 나는 매일 아침 아시아 외환시장 개장하기 전에 열심히 녀석들에게 물을 주었다. 때문에 사무실 한켠은 미니 정글이 돼버렸다. 나 없이도 잘 자랄 수 있을까. 5개월을 버티어야 될 텐데..


  수지한테 문자가 왔다. 이번 주말에 보자고. 런던 가기 전에 주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친했지만 생일 같은 날에 선물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그냥 가끔씩 수지는 소설과 시집을 내 손에 쥐어줬다. 교양도 쌓고 고급 한국어 어휘도 늘려보라고. 세심한 배려였다. 사실 나는 한국어로 시시콜콜한 감성까지 표현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니까. 저번에 준 동양 고전철학 입문서는 너무 감명 깊어서 샤프로 줄까지 쳐가며 정독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책을 주려나 상상하는 와중 블랙베리가 진동했다.


  +1로 시작되는 발신번호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Hey. I’ll be in London in late August. You around?”

  (안녕. 나 8월 말 런던에 있을 거야. 그때 시간 나?)


  웰즈였다. 샌프란시스코는 지금은 저녁 9시경. 반가웠다.




  그를 처음 만난 건 6월 초였다. 나는 처음으로 참석하게 된 클라이언트 접대를 끝내고 이태원 바 후시기에 들렀다. 수요일 밤이라 고즈넉한 공간에서 억눌린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풀고자 방문했던 날이었다.


  그날은 봉 상무님을 따라 대한전력 재무팀과 저녁식사가 있었다. 취리히 증권에서 인턴 따까리 하면서 주간 리포트만 신나게 써서 보낸 그 팀이다. 1차는 역삼역 근처 한우 꽃등심 전문집에서 얌전히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2차를 위해 인근 샤또 드 테헤란 (Château de Tehran)이란 룸살롱으로 향했다. 강남 한복판 지하 2층 술집치고 이름 하나 거창하게 짓지 않았나. 재무팀장이 거기에 자기가 킵 해둔 무언가가 있다며 계속 중얼거렸다 (국유기업 팀장 월급으로는 강남 룸살롱에 술병까지 킵하고 마시기에는 좀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뱅커들이 앞다투어 계산해주지 않으면 말이다). 모두들 착석했다. 방문이 열리더니 마담이 입장했다. 그녀는 70년대 말 하이틴 원조스타였단다. 나중에 말하기를 텔레비전 보급률이 저조해서 날개를 못 폈다고 (지금은 파운데이션과 귀금속 악세사리의 중력 때문에 아예 이륙조차 못 했을 거다). 참았다가 차라리 쌍팔년도에 데뷔했더라면 자기 대박이었을 거라고.. 뒤에서는 젊은 언니가 와인잔 8잔을 은쟁반 위에 들고 졸졸 따라 들어왔다.


  “자. 이 잔으로 마시면 와인이 엄청 감칠맛 납니다.. 제가 애지중지하는 애들이죠.”


  이런 찌질이가 있나. 업소에 꼽쳐둔 물건은 무슨 진귀한 스코티쉬 하이랜드 위스키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유리 장인 리델 (Riedel) 사의 창립 250주년을 기념하는 와인잔 세트였던 거다. 거기에 자기가 고른, 병당 60만 원 육박하는 프랑스산 포도주를 제공하는 건 DK였다. 어떻게 가격까지 아냐고? 나중에 내 법카로 긁었으니까.  


  “역시 팀장님 센스쟁이~ 그럼 저번이랑 같은 와인 가져올까요?”


  “음, 좋지.”


  마담은 언니와 소곤거렸다. 언니가 잠시 방을 나가더니 다른 두 명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언니는 둥근 양주병을 들고 나머지 두 명은 와인 한 병씩 든 채로. 멀리서 병 모양을 봐서는 왠지 브르고뉴산 피노 누아르 일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저 팀장이란 인간은 여기를 도대체 얼마나 자주 오는 걸까.


  “어머 팀장님. 오늘은 오래간만에 도이처 크레딧 사람들 데리고 오셨네. 봉 상무님 하도 안 오시길 서울 법인 철수한 줄 알았아요.. 호호. 그건 그렇고. 얘들아, 유럽계 은행분들은 역시 분위기도 너무 유럽스럽지 않냐?”


  언니 삼총사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은 각 잔마다 무식하게 이빠이 채워진 상태였다. 그런데 마담이 나를 가리키더니,


  “봉 상무님. 그런데 저기 뉴페이스 누굴까?”


  “이번에 뽑은 신입이야. 세진아, 인사드려라.”


  좀 어이가 없었다. 마담한테도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고 말해야 될 짓인가. 정말 누가 누구의 클라이언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룸살롱에서의 주객전도란. 옆에 밀착하고 앉은 언니가 내 왼손을 잡더니 자기 맨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그런데 부드러웠다. 하긴, 아침에 목욕하고 세타필 (Cetaphil) 바디 로션을 두 겹으로 덧바르면 내 피부도 저렇게 보들보들 해진다. 허벅지 주인은 아까 마담이랑 소곤거린 언니였다. 그녀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아마 이 업소의 와인 가격표를 전부 외우고 있을 거다. 입구에 번지르르한 투명 유리 와인셀러가 손님들을 마중했지만 메뉴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세진 씨. 우리 오늘 재미있게 놀아요. 저하고 나폴레옹 XO (Extra Old) 8년 숙성 꼬냑 마셔요. 안 마셔 보셨겠지만 맛은 뭐랄까? 쌉싸달달한 살구 베이스향 위에 오렌지 아로마가 잔잔한 파장을 치며 열대 카카오 가루가 입안에서 휘날리는 맛?”


  아니. 마셔봤다. 그리고 언니가 어설프게 읊은 묘사는 상자갑 안에 껴있는 제품 설명 책자 16쪽에 나와있는 한국어 번역과 대충 비슷하다. 지난여름 CCG 인턴십의 유일한 낙은 라벨 부착에 하자가 생겨 폐품 처리된 나폴레옹 XO를 집에 가지고 와 홀짝홀짝 마시는 거였다. 르누아르코리아는 버리기 아까우니 집에 한 병씩 가져가기를 상급직원과 CCG 파견  컨설턴트들에게 권장했다.


  마담이 꼬냑 병을 보며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어머, 너는 XO를 왜 저기다 올려다 놓았니? 저 꼬냑이 얼마짜-.. 우리 재무팀장님께서 먼저 시음해 보셔야지..”


  그리고 불쌍한 표정을 짓더니 목에 두 바퀴 휘감은 미키모토 st. 왕진주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투덜댔다.


  “저희 담당하는 르누아르 직원이 바뀌면서 공급 차질이 생겨.. 저거 구하느라 여기저기 다 수소문했다니까요. 웬일이야, 웬일.”


  세타필 언니가 고개를 숙이고 병을 나와 멀리 떨어진 마담 앞으로 갖다 놓았다. XO 같이 마시자고 할 때는 언제고. 황당했다.


  르누아르닷컴 현지 프랑스 사이트를 통해서 구매하면 나폴레옹 XO는 대략 50만 원이다. 그런데 이 룸살롱에서는 300만 원에 팔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물론 이 것도 내 법카로 긁어으니까. 한-EU FTA (자유무역협정)에 증류주를 포함시키든 말든 소비량이 비탄력적인 이유가 바로 요거다. 대한민국 룸살롱 유통채널이 너무나도 압도적이라 주류 제조자가 파격적인 가격 전략을 펼쳐도 소비자들의 반응은 전무하다는 것. 두피맨이 이 포인트 하나는 자기 두상처럼 제대로 파고들어 분석했다.


  다행히 대한전력은 다음날 1분기 실적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모두 샤또 드 테헤란에서 생각보다 일찍 나오게 됐다. 나에게는 탈출이었다. 무슨 강남 룸살롱 빠비용처럼. 강남의 교통체증을 무릅쓰고 고작 달려온 것은 다름이 아닌 이태원 바 후시기였다. 그냥 귀가하기는 아쉬워서 어디 조용한 데 가서 한잔은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누추해 보이는 1층 치킨호프집을 지나 지하로 내려갔다. 문을 열었다.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욕이나 런던의 어느 세련된 로컬 재즈바로 순간이동 한 기분이었다. 명곡 ‘A Nightingale Sang in Berkeley Square’ 이 턴테이블을 회전하고 있었다. 전설적인 미국인 색소포니스트 스탠 게츠 (Stan Getz)와 그의 절친 트롬보니스트 밥 브루크마이어 (Bob Brookmeyer)의 환상적인 편곡. 노래 배경은 런던의 부촌인 메이페어 (Mayfair) 한가운데 있는 바클리 스퀘어 (Berkeley Square)라는 작은 공원이다. 거기서 벌어지는 연인끼리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내가 앞으로 거래하게 될 상당수의 헤지펀드들은 바클리 스퀘어 인근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젠틀맨들의 돈 전쟁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항상 그랬듯 나는 바 카운터로 걸어갔다. 백인 남자가 홀로 앉아 위스키를 얼음 없이 마시고 있었다. Neat하게. 뜻 그대로 참 깔끔한 영어 표현이다. 옆 빈자리로 다가갔다.


  “Is this seat taken?”

  (이 자리 비었나요?)


  “It’s all yours.."

  (네, 마음껏 차지하세요..)


  미국 남자다. 이 여유로운 에티튜드. 나이는 한 40대 후반으로 보였을까? 나중에 일어날 때 보니 농구선수처럼 장신이었다. NBA 생중계 보면 가끔씩 멀대같이 큰, 완전 눈에 띄는 백인 선수들 있지 않나. 그런 이미지였다.


  네그로니를 시켰다. 빨강 루비 빛깔의 달콤 씁쓸한 캄파리 (Campari), 매콤한 산미를 증폭시켜 주는 진, 입안 밸런스를 잡아주는 베르무트 (Vermouth), 그리고 이태리 스타일 칵테일 특유의 길고 진한 여운을 선사해 주는 아마로 (Amaro). 이 네 가지 액체를 조합하면 내가 사랑하는 네그로니가 탄생하게 되는데..


  “Did you know that the Boulevardier is similar to the Negroni? But it simply substitutes gin with bourbon.”

  (블루바디에 (Boulevardier)가 네그로니 (Negroni)와 비슷한 거 아세요? 블루바디에는 다만 진을 버번 (Bourbon)으로 대체했을 뿐이에요.)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남부 미국인이었다. 텍사스? 좀 멋진 바 카운터 첫 대사였다. 이 늦은 시간에 ‘네 이름이 뭐니,’ ‘어디서 오는 길이니,’와 같은 지긋지긋한 멘트가 아닌 게 고마웠다.    


  “Oh, I didn’t realise. It sounds very disarming. Southern charm, I guess?”

  (몰랐어요. 사람 홀리겠네요. 미국 남부 특유의 매력처럼요.)


  어느새 우리 둘은 자연스레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웰즈였다.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찰스턴 (Charleston) 출신이었다. 직업은 야후 해외 비즈니스 전략팀장이었다. 때문에 수시로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도쿄, 서울을 일 년에 여러 차례 순방해야 했다. 또한 싱글이라고 대화 속 어딘가 흘린 것 같다. 예일대 영문학과, 인세아드 (INSEAD) MBA의 화려한 가방끈을 메고 있었다. 90년대 초의 인세아드는 그야말로 서구 정재계 슈퍼엘리트들의 파리 교외 놀이터였다. 그의 첫 직업은 월스트리트저널 한국 경제 특파원이었다. 도쿄를 지원했는데 공석이 나질 않아 서울로 보내졌고 그게 한국과의 첫 인연이라 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거점인 자카르타를 떠나 나가사키를 가려는 도중 제주도에 표류돼 조선에 억류된 하멜이 떠올랐다. 한글 독파한 지는 오래됐고 말도 어느 정도 떠듬떠듬했다. 스피킹 실력이 어느 정도 되냐고 물었더니 소비재와 내구재 같은 단어 정도는 안다고 했다. 놀라웠다. 그리고 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웰즈는 영문학과답게 위트가 넘쳐흘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내 웃었다. 그런 사람들 있지 않나. 농담해 놓고서 정작 본인은 웃지 않는 타입. 그런데 유쾌함 배후에는 늘 그늘이 있었다. 잦은 출장으로 많이 외로워 보였고 풀고 싶은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가슴속에 쌓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인테리어는 어둡게 조광 되어 있었고 웰즈의 회색 눈동자는 반짝였다.


  그가 말했다.


  서울 한복판 지하에서 나 같은 상대 만날 줄은 몰랐다고. 인생 재밌지 않냐고. 자기 호텔로 같이 가자는 눈치였으나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우리는 통했던 것 같다. 그냥 이방인끼리의 진솔한 대화만으로도 만족하고도 남았다는 것을. 라스트 오더를 받는다는 바텐더의 말을 듣고 우리는 일어나기로 했다. 고맙게도 웰즈는 내 네그로니 한잔과 블루바디에 두 잔도 함께 계산해 줬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따뜻한 봄바람에 버려진 찌라시들이 길바닥을 날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했다.


  “So I guess that’s it.”

  (그럼 이제 헤어질 때가 됐네요.)


  “I guess so, too.”

  (그러게요.)


  이때 아니면 기회가 다시는 없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깜박이는 치킨호프 간판 밑에서 발꿈치를 들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웰즈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게 5분 정도 얼굴을 맞대고 서있었던 것 같다.


  그는 지나가던 택시를 잡았다. 창문을 내렸다.


  “I really enjoyed tonight. Maybe we’ll meet again.”

  (오늘 밤 정말 즐거웠어. 우리 어쩌면 또 만날 수 있으려나.)


  택시는 길거리의 너저분한 간판들을 비집고 멀리 사라졌다. 다음이란 또 있으려나. 아쉬움을 간직한 채 이태원역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도중 차를 잡았다. 택시는 한남대교 북단을 지나고 있었다. 불면증에 걸린 서울의 야경이 하나의 빚덩이로 뭉치더니 내 시야를 가렸다. 금사빠 짝사랑의 아픔은 이런 건가. 옷깃이 닿기만 해도 몇 겹의 인연이 있다는데. 수만 찰나동안 볼을 맞대고 서있던 상대하고는 머나먼 과거에 어떠한 관계였을까나..




  “Hey Wells. I get there on July 31st. Let’s grab a drink when you’re in town.”

  (안녕 웰즈. 7월 31일 도착해. 런던 오면 한잔 하자.)


  “Absolutely. I’ll call you when I land.”

  (물론이지. 런던 가서 전화할게.)


  ‘I miss you’라고 답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블랙베리를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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