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랍스터>와 사랑 이야기

비틀린 멜로 드라마 속 사랑을 말하는 방법

by 이정

‘더 랍스터’에서 주인공이 사는 세계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분명 사랑을 하지 못하면 동물이 되는 세계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가족의 모습은 현재에는 세계에서 한 발 뒤떨어진 SF적 세계관의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시종일관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의 행동들은 세계관 속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주인공 ‘데이비드’를 제외하고는 단 하나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구축된 세계는 상당히 인공적이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며, 심지어 이러한 느낌을 지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누구의 감정도 담지 않고 배제되어 움직이는 카메라는 관객에게 세계에 몰입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철저하게 한 발짝 거리를 두고 관찰하게 만든다.

주인공은 여기서 두 가지의 세계에 마주한다. 하나는 사랑을 하지 않으면 동물이 되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하면 형벌이 내려지는 세계이다. 얼핏 보면 두 개의 세계는 완전히 반대되어 보이지만 둘 다 ‘사랑’을 매개로 목숨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관객들은 문득 기이하고 인공적이기 짝이 없는 영화 속 세계가 현실과 묘하게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게 된다.

첫번째로, 사랑을 하지 못해 동물이 될 위기에 놓인 남자 주인공이 도망친 또 다른 세계에서, 우리는 명백한 멜로드라마의 양식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가로막는 어쩔 수 없는 시련이다. 다만 다른 멜로드라마에서는 이것이 사회적 핍박, 갈등으로 은유되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은유가 없이 직접적이다. 흔히 어쩔 수 없는 시련이 두 사람의 사랑을 더 결속시키는 배경이 되듯이, 여기서는 ‘사랑할 수 없는 곳’이라는 장소 그 자체의 시련이 두 사람이 사랑하게 만든다. 그 시련을 극복하려 하면서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관계는 더욱 결속된다. 그리고 이 숲에서 놀라운 사실은 사랑을 하는 게 주인공 뿐 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전에 주인공이 숲으로 처음 왔을 때, 입술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그를 안내해준다. 사랑이 금지되어 있는 세계에서, 사랑을 하고 이미 형벌이 내려진 인물이 있다는 건 상당히 상징적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다른 세계에서 사랑을 하기 위해 형벌과 죽음을 무릅쓰는 여타 다른 커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만약 여기가 다른 동화 속 세계였다면,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같이 죽음을 감수하고 사랑을 탐한 숭고하고 애처로운 사연의 커플로 보여질 것이다.

그리고 결국 주인공은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사랑의 고백과 함께 시련에서 벗어나는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제안한다.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몸의 언어로, 상대방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주인공은 멜로드라마 특유의 과잉된 양식으로 보인다. 사랑이 금지된 세계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 둘만의 언어로 사랑의 도피를 말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멜로드라마가 아닐 수가 없다. 사랑의 도피야 말로 멜로드라마 속 오래된 클리셰이자, 누구나 알고있는 클라이맥스였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양식이 있는데, 바로 이성 간에 공통점이 있어야 사랑을 시작 할 수 있다는 설정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은 세계 속에서 절대적으로 지배한다. 이것 때문에 남자는 억지로 공통점을 만들어서 사랑을 꾀하기도 하고, 같은 결핍이 있는 여자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애초에 공통점이 없으면 사랑은 절대 시작되지 않는다. 공통점을 나누는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생각 해보면 여타 다른 멜로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다른 멜로드라마의 서사를 생각해 봤을 때,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첫 만남의 계기 역시 바로 공통점 찾기가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생각했을 때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 근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사랑에 빠지는 건 운명적인 만남과 같다. 서로 다르게 사는 두 사람이 하나의 공통점을 찾았을 때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건, 또 하나의 오래된 멜로드라마 클리셰다.

이처럼 ‘더 랍스터’에서는 명백하게 보이는 멜로드라마의 양식들이 있다. 이것들은 의도적으로 가져와 일부러 도식적으로 보여지게 연출되어 있다. 하지만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이것들을 이용해서 말하고자 하는 건 지금까지의 멜로드라마와는 정 반대의 이야기다.

지금까지의 멜로드라마에서 사랑은 성역이나 다름이 없다. 고귀하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이고, 운명적이고 낭만적이다. 로맨틱하고 과장된 연출을 사용해서 포장하고, 사랑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수많은 연인들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멜로드라마에서는 목숨보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수없이 말해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랍스터’에서는 멜로드라마의 양식을 가져와서 이용하지만, 사랑이 생존을 위해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공통점이 있어야 사랑이 시작된다는 클리셰를 사용하지만, 이 때문에 살기위해 사랑하는 척을 꾸며내야만 한다. 사랑하지 못하면 죽어야 하지만 죽기 싫으니 사랑을 만들어오기라도 해야 한다.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이용당하는 사랑이다. 지금까지의 멜로드라마에서 수없이 말해왔던 얘기와는 정 반대의 얘기다.

이렇게 생존 때문에 이용당하고,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사랑’이란 감정은 상당히 차갑고 적나라하게 보인다. 모든 것을 걷어내고 차가운 수술대 위에 올려진 사랑은 오히려 상당히 보잘것없고, 하찮고,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허상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더 랍스터’ 속에 존재하는 세계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사랑에 대한 통찰이라 말할 수 있다.

‘더 랍스터’는 어림잡아 현대, 혹은 아주 가까운 근미래 쯤에 세계로 보인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영화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사랑을 이렇게 재해석 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란티모스는 사회를 다분히 냉소주의적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가 끝을 다라고 있고, 사회적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재 사회에서, 사랑을 포함 한 사람 사이에 관계와 그 속에 놓인 감정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지 오래다. 그야말로 인간성의 말로다. 현대 사회는 다같이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이것이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면서 이질감과 동시에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기괴하고 차갑게 느껴지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현대 사회에 그렇게 다를 바가 없다.

고로 란티모스가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회에서, 하나의 자조적 기록과 같다. 란티모스는 이 영화에서 사랑을 비웃고 있다. 목숨보다 중요한 사랑이,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 되면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가차 없이 이용 당한다. 이 영화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찾는게 오히려 웃음거리처럼 보일 정도다. 감독은 영화 내에서 이렇게 물어보는 듯하다. 여전히 사랑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우리 모두 사랑의 환상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기에는, 이미 너무 차갑게 변해버리지 않았냐고. 사랑은 인간의 마지막 가치와 같다. 인간성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지금 여기는 여전히 충분히 사랑할 만한 사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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