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에게 처음 사랑한다고 말했던 날, 그녀는 웃으며 내게 되물었다.
"에이, 뻥 치시네. 그건 너무 오바 아니야?"
솔직히 조금 서운했다. 사랑과 만난 기간이 꼭 비례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잖아. 사랑이 뭐 별 거야? 그저 매일 생각나고, 생각하면 웃게 되고,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고, 그러니 무엇이든 내어주고 싶고, 뭐 그런 게 사랑 아냐?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때가 벌써 작년이다.
이랬던 그녀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처음 말했을 때의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이제는 그녀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자주 해준다. 내 진심이 드디어 전달된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미안하기까지 하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고맙게도 그녀가 먼저 말을 해주니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만큼은 내가 더 많이 해주고 싶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난 앞으로도 사랑만큼은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그녀와 단둘이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조그마한 글램핑장 하나를 예약해 1박2일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함께 밤을 보내는 첫 날이기도 했다.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도 시청하고, 고기도 구워 먹고, 겨울의 찬 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 동안 불멍을 때리기도 했다. 소소하지만 행복한 추억을 그녀에게 선물해준 것 같아 뿌듯했다. 그녀가 즐거워하니 덩달아 나도 즐거웠다. 오랜만에 즐기는 제대로 된 휴가이자 힐링인 시간이었다.
우리는 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 '신과 함께'를 보면서, 우리가 죽으면 가게 될 지옥은 어디일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모두 나태지옥을 꼽았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곳이 가장 버티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 참으로 나태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낄낄. 멀리 강원도까지 와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이런 이야기를 하며 킬킬대는 그녀를 보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가 그녀의 연인이라는 게 실감이 나 안도했고, 그녀가 나를 편하게 느낀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고기를 구워 먹을 때는 연인을 넘어 부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밖에서 고기를 굽고, 그녀는 숙소 안에서 찌개를 끓였다. 그 모습이 꼭 신혼집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살면서 찌개를 처음 끓여본다고 말하는 그녀가 어찌나 귀엽던지. 그런 그녀가 날 위해 찌개를 끓여준다는 건 또 얼마나 황송하던지. 비록 찌개 속 면은 퉁퉁 불어 있었지만, 그동안 먹었던 그 어떤 찌개보다도 맛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고기와 찌개, 그리고 와인을 함께 먹으며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어디서 찾아왔는지 모를 길고양이들도 우리의 모습에 샘이 났는지, 훼방을 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더라. 아니면 고기 냄새가 좋아서 그랬나? (ㅎㅎ)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숙소 뒤편에 나란히 앉아 불멍을 때렸다. 1년 중 가장 춥다는 1월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날씨도 우리를 도와주는 듯했다. 바람은 고요하고 적당히 입김이 나오는 포근한 추위가 우리를 감싸 안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함께 과자를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시간 동안은 신혼부부를 넘어 오랜 세월을 함께 불태워온 노년부부가 된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불길이 닿지 않는 등골은 조금 차가웠지만 가히 마음만큼은 따뜻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지쳐 있었던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준 것 같아 뿌듯했다. 앞으로도 그녀와 이런 곳을 자주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녀의 집에서도 벌써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덕분일까? 함께 마음을 나누기 시작한 지는 이제 겨우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벌써 오래된 연인처럼 편하고 진해졌다. 그녀만의 감성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그녀의 집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웠던 덕분에, 심리적인 거리도 그만큼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떨 때는 그녀의 집을 너무 자주 방문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가 시도 때도 없이 눈에 아른거리는데, 안 찾아갈 수가 없지 않은가. 그녀가 조금은 귀찮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늘 웃으며 나를 맞아주는 그녀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녀가 목소리를 들려주어서 고마울 뿐이다. 그녀의 얼굴을 만질 수 있어서 고마울 뿐이다. 당연한 것처럼 만날 수 있어서 고마울 뿐이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어 고마울 뿐이다.
벌써 행복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너무 행복한 나머지, 불안하기도 하다. 어쩌면 나의 속도가 너무나 빠른 것은 아닌지, 그래서 때로는 속도를 늦추고 차분하게 서로를 살펴야 할 때를 놓치고 지나쳐 버리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편하고 가까운 우리 사이를 당연시하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당연시함을 내가 범하게 된다면, 정말 비참할 것만 같다. 그냥,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에 겨운 나머지, 살펴야 하는 것들마저 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복한 날들만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분명히 힘들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시간이 기필코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지, 나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언젠가 기어이 오고야 말 테지. 이제 나는 그 때를 대비해야 한다.
이 글은 그 상황을 직면할 미래의 나에게 남기는 경고문이 되겠다. 명심해라. 사랑은 그저 주는 게 아니라, 내어주는 것이다. 별 거 아니다. 그저 생각나고, 웃게 되고, 보고 싶은 만큼 내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저 네 사랑을 내어주고, 필요하면 시간을 내어주고, 거리를 내어주고, 기다림을 내어주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행복한 만큼만, 내어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넌 아마도 나태지옥을 가게 되겠지.
내어줄 결심. 올해 새기는 새해의 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