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되었다

by Lusaka

작년 이맘 때쯤, 세상에는 현실이라는 단어마저도 불쾌해하던 '나'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나라는 사람은 현실에 지독하게 실증을 느낀 나머지, 현실에서 벗어나 소설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다. 오랫동안 회자되는 베스트셀러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두명 정도는 의미있게 읽어줄 수 있는 모노드라마면 만족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사람은 소원을 이뤘을까? 물론 소설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작년을 살던 그의 말을 빌어보자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타인들의 희극 사이에서 삭막한 비극을 살았다더라.


나라는 사람은 그래서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처럼 살 수 없으면, 현실을 소설처럼 꾸며보자며. 가까이에 있는 1인칭의 비극을 각색해, 머나먼 타인에게도 읽힐 수 있는 희극이 되자며. 그렇게 소설 쓰기를 시작한 지 딱 1년이 지났단다. 그동안 쓰인 소설은 고작 1인칭의 비극 몇 편이 전부. 그나마도 회사라는 현실에 다시 몸을 던지고 나서는 한 편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작년의 나는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더라. 아니, 다시 현실이 되었다더라.


그런데 올해의 나는 작년의 나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더라. 올해의 나의 말을 빌어보자면, 어느 영화의 홍보 문구처럼 '올해 최고의 미친 영화'같은 삶을 살고 있다더라. 아마도 다름 아닌 그녀 덕분이겠지. 올해의 내가 살아가는 세상 한 가운데에 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그녀가 등장했으니까. 그녀 자체가 올해의 나에게는 소설이라더라. 누구에게나 회자되는 베스트셀러는 아니겠지만(그래서도 안되겠지만), 나 한명에게만큼은 그 어느 것보다도 의미있게 읽히는 단 하나뿐인 이야기. 올해의 나는 이 소설의 제목으로 그녀의 이름을 딴 '미니시리즈'라고 지었다더라. 장르는 무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로맨스.


이 비현실적인 로맨스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회사라는 현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더 현실처럼 피부에 와닿는다고. 소설 속 아름다운 대사들이 현실처럼 귀끝을 때리고 눈앞을 아른거리며, 입술에 닿아 춤을 춘다고. 심지어 대사만으로는 느끼기 어려운 후각에 대한 묘사는 가히 기가 막힌다더라. 그녀를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그녀의 냄새가 난다나 뭐라나. 그만큼 설렌다더라.


그중 특별히 설레는 부분은 바로 호칭이라더라. 회사에서 만난 만큼 사내에서는 서로를 직급으로 부른다고.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서로를 너라고 부르다가도, 다음 날 회사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대리님, 과장님 하고 극존칭을 쓴다고 한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설렐 거리냐고?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올해의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더라. 과장님이라는 호칭에 단어 하나씩만 덧붙여도 세상에서 가장 설레고 자극적인 말이 된다고. 들어보니 그거 참 설레긴 하더라.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가 합쳐지니 정말 자극적이기까지 하더라. 과장님, 보고싶어요. 과장님, 좋아해요. 과장님, 뭐해요. 과장님, 메롱. 과장님, 있다 봐요. 과장님, 지금 뭐 하세요? 과장님이랑, 내가? 등. 올해의 나는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또 듣고 싶다며 모니터에 대고 칭얼대더라.


더욱 가관인 건, 이렇게 직급으로 높여 부르다가 다시 '나'와 '너'로 돌아올 때면 이상하게도 기분이 야릇해진다더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너라고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더 섹시하게 느껴진다나 뭐라나. 게다가 요즘 그녀는 이제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낮이고 밤이고 과장님과 너라는 단어를 섞어서 쓰기 시작했다더라. 느즈넉한 밤, 그녀와 몸을 꼭 붙이고 누워있을 때도 그렇단다. 피곤에 절어 퉁퉁 부어 있는 올해의 나의 눈을 바라보면서 과장님, 하며 직급놀이를 하는 그녀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더라.


그래서 올해의 나는 하루 하루가 늘 소설같다더라. 치밀한 이중생활을 살아가는 스파이의 비밀스런 사랑이야기 같기도, 남들의 눈을 피해 내통하는 첩보원과 정보원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더라.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든, 그녀와의 연애가 소설같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모양이다. 아니면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모든 현실을 소설로 각색하고 있는 걸지도. 하지만 그런들 또 어떠하리. 소설이라고 느낄 만큼 행복하면 그만 아닌가. 올해의 내게 그녀는 그만큼 비현실적인 존재다. 그렇게 싫어하던 현실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게 만드는 존재다.


올해의 나는 그렇게 소설이 되었다. 호칭 하나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녀라는 미니시리즈가 되었다. 앞으로 이 미니시리즈는 몇 장까지 가게 될까? 오래 오래 끝나지 않는 장수드라마가 되는 그날까지, 올해의 나는 그녀를 계속 사랑하겠다더라. 그녀가 웃을 수 있도록 재롱을 부리고, 그녀가 힘들지 않게 꼭 안아주겠다더라. 그녀가 아플 때면 옆에서 함께 아파하며 고통을 나누겠다더라. 그래서 내일도 만나러 가겠다더라.


대리님,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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